
좋은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없다. 밑도 끝도 없이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 보다는 특정한 디자인 속에 들어 있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 할 것이다. 에바솔로라는 주방용품 브랜드에서 만든 이 사과 깎는 기구도 디자인 바깥에서 만든 기준 보다는 디자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살펴 볼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금속 판이 둥글게 돌아가는 면을 이루고 있는 구조와 유려한 곡선으로 다듬어진 양쪽 끝 부분들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조형미를 한껏 즐기게 해준다. 차가운 스테인레스 스틸의 금속질감과 검은색의 플라스틱 질감 또한 서로 강한 대비를 이루며 형태의 아름다움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형태나 색은 단순하지만, 안에 담긴 조형적 처리들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조각품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깊이 있다. 이게 고작(?) 가정에서 사용하는 사과 깎는 도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런 노력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이 디자인은 확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형태가 단지 아름다운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용성에서도 우수하다. 우선 둥근 구조는 한 손아귀에 딱 들어오는 크기와 모양이다. 엄지 손가락을 둥글고 오목한 가운데에 넣고 손아귀를 꽉 쥐면 한 손에 촥 감겨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 감촉이 좋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도구로 사과를 깎는 방법이 쇼킹하다. 이 도구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과의 껍질을 깎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속을 파내는 도구이다. 사과라 하면 과도로 껍질을 부드럽게 정성들여 깎아내고 먹는 것이 동서고금의 일치된 관행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도구는 그런 인류의 오래된 습관을 단박에 전복해 버린다.
이 도구를 손에 꽉 쥐고 사과 씨가 들어있는 단단한 부분을 향해 찔러 넣어서 한 바퀴를 돌리면 사과 중심 부분이 원기둥 모양으로 잘라진다. 물론 각도나 힘 조절을 잘해야 한다. 좀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아무튼 그 부분을 쏙 빼내고 나면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지니 마음껏 편안하게 사과를 베어 먹을 수 있게 된다.
생각해 보면 사과를 먹을 때 많은 방해를 주는 것은 사과의 껍질이 아니라 씨가 함께 들어있는 딱딱한 사과의 속이다. 껍질이야 먹을 수도 있지만 이 속은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과 껍질을 깎는 도구들은 많았어도 사과의 속을 파내는 것은 없었다. 얼핏 보면 그저 편리한 하나의 도구, 기능성에 입각한 디자인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도구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사과 먹기의 맛은 단지 혀의 감각을 넘어선다. 이 도구는 단지 사과를 깎는 기능적인 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먹는 새로운 방법을 재시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사과를 이렇게 먹을 수도 있구나! 맛도 맛이지만 기존의 사과 깎는 칼에서 느낄 수 없는 깔끔하고도 현대적(?)인 사용방법을 만끽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삶의 즐거움이란 이런 데에서 더 질감을 얻고 확대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디자인의 가치라는 것이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와 ‘기능’이라는 도식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는지도 잘 알 수 있다. 기존의 도식적 가치관으로 본다면 이 디자인의 가치는 전혀 포착이 안 된다.
이 디자인은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기능미나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뛰어난 성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디자인이 주목받는 것은 새로운 쓰임새의 창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움은 단지 아름답고, 보다 기능적인 것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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