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서 깊은 거대 명품 하우스의 화려하고 볼거리 가득한 패션쇼로 채워진 파리 컬렉션에 비하면 런던 컬렉션은 단출하다. 그러나 그 내실은 이제 막 터지기 직전의 용암처럼 뜨겁다. 런던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자신의 생에 첫 컬렉션을 준비한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은 세상도 집어삼킬 뜨거운 마그마지만, 세상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여리디 여린 병아리 한 마리일 뿐이다. 거대 기업이야 콘셉을 위해서라면 패션쇼장에서 기마 행렬도 할 수 있고 시골 마을도 옮겨 올 수 있겠지만,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옷을 세상에 내보일 컬렉션조차 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런던은 시스템을 만들었다. 차세대를 이끌어갈 패션 디자이너를 탄생시키기 위해 학교와 언론, 기업, 영국 정부는 일사분란 하게 움직인다.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이렇게 돌아간다. 세계적인 디자인 명문 센트럴 세인트 마틴의 석사 졸업 패션쇼에서 될 성 부른 떡잎을 모아 패션쇼를 개최하여 언론과 대중에 공개한다. 한 사람당 열 벌 남짓의 옷을 선보이는 미니 컬렉션이다. 여기서 언론에 노출된 디자이너는 다시 패션 이스트에 지원한다.
패션 이스트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톱숍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로 이곳에서 남성복 분야 3명, 여성복 분야 3명을 선정하여 컬렉션을 지원해 주며 디자이너의 브랜드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졸업 패션쇼와 패션 이스트의 선택을 받는 것만으로도 신인 디자이너에게는 든든한 백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 경쟁 체제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화려한 시작을 하기 위한 디자이너의 개인적 열정과 디자인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거대한 경쟁을 뚫고 탄생한 새로운 신데렐라가 있다. 시몬 로샤. 아일랜드 출신의 이 디자이너는 영국의 중견 패션 디자이너 존 로샤의 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은 그녀의 패션쇼를 보고 난 후 도대체 어떤 디자이너인지 궁금해져서 알아봤던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컬렉션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는 것이다.
처음에 든 생각은 제 2의 마르틴 마르지엘라의 탄생인가 하는 것이었다. 분명 옷의 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은 그녀의 컬렉션의 큰 특징이다. 네 번의 쇼를 통해 이 특징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하지만 옷을 해체하여 구조를 바꾼다기 보다는 옷의 투명성을 강조하여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녀의 옷은 기존의 재킷이나 스커트의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고, 다만 중간중간을 잘라내거나, 부분적으로 투명하게 하거나, 소재를 믹스매치하는 방식을 쓰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실험적이면서도 실용적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인 시-스루 옷의 특징인 섹시하거나 야하다는 인상보다는 여성스럽고 부드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가슴과 허리의 S라인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낙낙한 실루엣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학수 현 디자인 연구소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