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학자와 이야기 하는 것보다 묘령의 처녀하고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낫다”라고 중국의 현인 임어당은 말했다. 참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누가 골치 아픈 수학자들과 마주보고 이야기 하고 싶어 할까? 반면 아름다운 처녀하고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든 그 시간만큼은 아주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디자인도 비슷하다. 자기가 수행해야 할 의무와 완벽한 외모에 입각해 있는 엄숙한 디자인이 고맙긴 하지만 수학자만큼이나 부담감을 주는 건 사실이다. 좀 어설픈 구석이 있더라도 사랑스러운 디자인이 훨씬 낫다. 어렵게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묘령의 오뚜기 모양은 좀 우리의 마음을 끄는 면이 있다.
유려한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몸체는 눈을 파고 들어오는 맛이 있다. 자기를 애써 내세우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곡면의 흐름이 무척 매력적이다. 아래쪽의 묵직하고 둥근 덩어리가 중심을 잡아주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윗 부분은 마음 놓고 위로 강렬하게 솟아오르고 있다. 둥글고 뾰족한 움직임들이 다이나믹하게 어울려 있는 강한 인상의 조각이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이루어진 금속성 몸체가 번쩍이는 광택 없이 묵직한 무게를 아래로 담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차가운 재료의 질감은 무광 처리된 표면으로 인해 따뜻한 피부를 얻었고, 몸무게의 대부분을 둥근 아래쪽에 싣다 보니 언제나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도 한 손에 들어올리기에도 모자라는 작은 크기의 물건이지만 덕분에 넉넉한 여유와 덕을 가진 물건이 되었고, 손만 가까이 가져가면 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기능은 이런 거다 라고 크게 외치지는 않지만 눈에 띄지 않게 배려한 면모들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사실 크기가 너무 작고 모양이 예쁜 까닭에 팬시 용품이나 캐릭터 상품의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자칫 모양만 앞세운 쓰잘떼기 없는 물건 취급을 받을 공산도 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작은 물건은 더 우리의 마음에 묘령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반전의 효과도 커진다. 이 작은 물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매우 긴요한 역할을 한다.
너무나 맛이 있지만 그 맛을 보기 위해서는 두터운 껍질의 장벽을 넘어서야만 하는 오렌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오렌지의 두터운 껍질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과도를 가지고도 어떻게 하기 어렵고, 손톱은 과불급이고, 온갖 도구들을 총 동원해서야 겨우 어렵게 오렌지의 맛을 보는 경험들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뚜기처럼 생긴 이 우아하고 조그마한 덩어리 하나만 있으면 그런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다. 하늘을 향해 있는 뾰족한 부분. 그 중에서도 낚시바늘처럼 뾰족하게 나와있는 부분을 통하면 난공불락의 오렌지 껍질은 아주 고분고분하게 다룰 수 있다. 낚시 바늘처럼 삐져나와 있는 부분의 높이가 오렌지 껍질의 두께와 비슷하고 유려하게 흐르는 몸체의 곡면은 오렌지의 둥근 몸체를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한다.
즉 이 오뚜기 같은 물체를 한 손에 잡고 오렌지 껍질에 대고 주욱 그으면 오렌지 껍질 안쪽의 속살에는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오렌지 껍질을 마음대로 벗겨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있을 때는 다소곳한 묘령의 여인 같지만 오렌지 껍질 위에서는 단호하게 자기의 능력을 보여준다. 자기의 기능성을 물리학이나 첨단기술로 무장하고 설파하는 독일식 디자인에 비해 이 디자인은 묘령의 여인처럼 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런 디자인이라면 사용하기 보다는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최경원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