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단한 이름을 가진 의자이지만 단단해 보이지는 않는 의자이다. 구조적인 결함이 있어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형태가 주는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이다.
의자라는 실용적 물건에 요청되는 기능적 견고함은 일견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조금 더 뒤로 물러나서 보면 서양의 조형예술이 옛날부터 지향했던 방향이 그러하기도 했었다. 견고한 수학적 질서로 단단하게 구축된 파르테논 신전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인체조각이나 건축, 20세기 들어와서 만들어진 절대적 조형이론, 그것이 수학이론, 특히 기하학 논리의 조형적 변용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공론화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조형적 견고함을 지향하는 서양문화의 입장은 국제적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21세기로 넘어 오면서 이런 분위기에 커다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기능주의와 견고한 형식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겨오던 서양의 디자인에서부터 형식적 견고함을 벗어던지려는 시도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디자인을 떠받치고 있던 근본이 바뀌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산업 디자이너 페트릭 주앙의 의자 솔리드는 그런 변화의 단적인 예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이 의자라는 사실을 간파하기는 어렵다. 벌건(?)색도 색이지만 가느다란 선적인 재료들이 분출해 흘러넘치는 듯 한 모습은 견고한 기하학 구조와 완벽한 기능성을 구현했던 기존의 디자인들이 가졌던 면모와는 사뭇 다르다.
의자에 앉았을 때 적어도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시각적인 안정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양은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법 구조적 문제가 계산되었음을 알 수는 있지만 일부러 그런 안정감을 회피한 흔적들이 농후하다. 견고한 구조 주변으로 일부러 불규칙한 부분들을 밀집시켜 놓은 것을 보면 디자이너의 그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안정감을 일부러 피하고 이처럼 불안정한 디자인을 선택한 것일까.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보다는 세계관의 변화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 디자인이 완벽한 어떤 아름다움이나 성능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대신 이 디자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의자의 살아 숨 쉬는 역동성이다. 가느다란 가지들이 파워풀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엮여있는 모습들은 마치 강하게 솟구치는 나무 가지들의 얽힘이나 액체들의 비균질적인 흐름을 연상케 한다. 적어도 고요한 공간 속에 고즈넉하게 앉아 있는 물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무생물, 게다가 산업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스틱에서 살아 숨 쉬는 자연물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과 동등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의자 디자인은 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디자인이 아무리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해도 이런 류의 파격적 접근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좀 어려울 것이다. 좀 생소하긴 해도 이 의자에서 느낄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듯 한 인상이야 말로 서양의 조형예술이 발전해 왔던 근본을 건드리고 있다.
생각에 따라서는 이러한 과격한 인상이 사람들에게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추구하면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경우가 많다. 이 의자는 의자의 살아 숨 쉬는 듯 한 인상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제품의 뒷자리로 물렸던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감이야 말로 공업재료의 첨단에 서있는 플라스틱마저도 살아 숨 쉬는 재료로 만든 근본원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디자이너 페트릭 주앙은 자기의 디자인을 생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 같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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