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반군이 트리폴리의 주요 거점을 모두 장악하고 카다피의 소재 파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카다피는 알제리로 망명하기 위해 리비아 서쪽 국경 도시인 가다미스에 도착했으며 알제리 정부와 입국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카다피 가족들이 이미 그곳에 들어와 있음에도, 막상 카다피 본인의 망명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인 듯하다. 알제리는 리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리비아와는 동맹 관계다. 특히 1999년부터 집권 중인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은 카다피와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왔다. 알제리가 카다피의 망명국으로 선택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뒤에서는 리비아 시민군이 현상 수배까지 해가며 행방을 쫓고 있고, 친구라고 믿고 의지하려던 알제리 망명은 거절당해 진퇴양난의 기로에 그는 서 있다.
카다피는 1942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아들로 리비아 사막의 한 천막에서 태어났다. 1963년 리비아대학교와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꾸준히 진급해가며 동료 육군 장교들과 더불어 쿠데타를 계획했다. 27세의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9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 왕을 물러나게 한 뒤 정권을 잡았다.
젊은 카다피는 집착에 가까운 열의로 리비아의 개혁에 나섰다. 1950년대 말 리비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자 외세에 국가의 대부분을 장악 당한 나라였다. 대부분의 부는 11만 명의 이탈리아 출신 정착민들 수중에 있었고, 동부 사막 지대의 석유는 서방의 석유 회사가 차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카다피 같은 리비아의 젊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혁명만이 미래의 길이었을 것이다. 초기의 카다피는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외국 군 부대를 철수시키고 이탈리아 정착민들을 내몰았다. 1920년대 무솔리니에 의해 국민의 4분의 1이 넘는 리비아인들이 죽었던 원한에 대한 보복도 했다. 외국 석유 회사들을 빼앗아 국유화했다.
표면상으로는 이슬람교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인민정부 형태를 띄면서 동시에 산업 국유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카다피는 나라를 근대화시키는데도 성공하였다. 석유 자금으로 오지에까지 학교, 병원, 공공 주택을 세워 리비아의 평균 국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사회 개조를 단행했다. 동시에 여성 노예를 해방시켰다. 여성들의 머리쓰개도 벗겼다. 그리고 교육의 기회도 열어 주었다. 그래서 대학생 중 여성의 비율이 절반을 넘을 정도에 이르렀다. 엄격한 이슬람교 규율에 따라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켜 건전한 사회로 인도했다. 혁명을 시도했던 초심이었을 것이다. 산업 국유화에도 성공하였다.
그는 명예와 권력 그리고 경제력까지 다 갖추게 되었다. 한 마디로 무서울 것, 부러울 것, 염려할 것 없는 안하무인이 되었다. 리비아 내에서의 위치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이 국외로도 향했다. 전 세계의 다양한 혁명 단체와 테러 단체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 거주 망명자들의 암살과 유럽의 유혈 테러 사건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때로 코믹하기도 했다. 전 美 국무장관인 콘돌리자라이스를 공개적으로 흠모한 것도 독재자 카다피에게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그의 순수함이 코믹하게 다가온다. 그의 유명한 ‘튀는 패션’에도 그런 배경이 있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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