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0년 대를 주름잡던 필립스탁이 어느 덧 눈에 띄지 않고 있어서 세월의 무상한 흐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계를 좁다하고 수많은 디자인을 다반사로 쏟아내던 그였지만, 어느날 더는 상업적인 디자인을 하기 싫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스스로 은퇴를 선언해 버렸다. 할 만큼 다하고 나서 그런 천명을 세상에 내 뱉는 점에 대해서 약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거장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럴 즈음이 되면 자연스레 회고라는 말을 머리에 떠 올리면 그의 지나간 자취를 좀 더듬어 볼 생각을 하게 된다. 워낙 뛰어난 디자인을 많이 했던 그였기에 수 많은 걸작들이 뇌리에 떠오르긴 하는데, 좀 매니아적인 시각으로 그의 디자인들을 반추해보면 연일 디자인지 지면을 장식했던 것 보다는 좀 덜 알려졌지만 한 번 쯤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할 디자인들이 먼저 손에 꼽힌다. 대표적인 것이 벽걸이 시계 ‘Whale’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1989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난 디자인이다. 상품으로 보면 이미 라이프 사이클을 종료하고도 남은 것이며, 실지로 매장에서 사기도 상당히 어렵다. 그 상당 부분은 이 디자인이 필립스탁의 작품들 중에서도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디자인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생긴 것을 보면 필립스탁 특유의 곡면이 여전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시침과 분침만이 있는 시계라는 것이다. 필립스탁 특유의 유머감각이 잔뜩 묻어나온다. 하지만 단지 유머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시계의 이름은 ‘Whale’ 즉 고래이다. 고래 꼬리 같은 느낌도 들고 대양을 유유히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의 유연한 몸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그런 형태 이미지의 이미테이션 차원이 아니라 좀 더 시적인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계를 벽에 붙여 놓으면 잘 알 수 없다.
몸통을 잃어버린 시침과 분침 같지만 이 시계가 벽에 붙어서 ‘찰칵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이 시계의 이름은 모양 때문이 아니라 움직임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하얀 벽 위로 유영하듯, 바늘이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너무 좋은(?) 부분들이 움직인다. 마치 어미 고래와 자식 고래가 넓은 대양을 가로지르며 우아하게 헤엄치는 것 같다.
벽시계라고 하면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격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할 만 한 시계라고 함직한데, 이름과 유영하는 듯 한 움직임들은 단지 수사학적인, 은유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는 것은 좀 아쉽다.
필립스탁은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왜 고래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고래가 상징하는 이미지와 큰 바다 속을 조용하게, 그러나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필립스탁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을 헤엄치는 벽시계를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이름이야 어떻게 되었든 하얀 벽에 붙어서 쉬지않고 몸을 움직여 유영하는 이 단촐한 시계를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고래처럼 유연하게 웅대한 시간의 바닷 속을 움직이고 있는 시계의 내면을 보는 것은 여간 흥미롭고 의미있는 일이 아니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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