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일본의 행보는 그야말로 밥맛(?)이다. 한·일 축구 대항전이야 그렇다고 쳐도 국회의원들의 독도 방문시도라든가, 한류 폄하같은 행위들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심한 행위들이다. 원전사태 때를 생각하면 정말로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 아줌마들에게만 어필하는 특수한 현상이라고 보았지만 어느덧 일본의 젊은이들까지 한국의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실시간으로 따라 부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을 대표하던 기업을 한국 기업이 앞지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영화나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분야의 선전도 눈부시다. 그러니 일본 사람들의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일견 이해할만하다.
게다가 우리는 땅떵어리도 아직 하나로 합쳐지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이 정도로 두 배가 넘는 인구와 국토의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디자인 분야는 일본을 뒤로 밀어내기에는 많이 모자란다.

한국 내에서 디자인이 상품이라든지 산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일본은 이미 오래 전에 디자인으로 학문적 철학에 이르는 지경까지 다달아 있다. 물론 디자인에 확보된 철학은 마케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산업적으로도, 상업적으로 효과적인 무기란 것은 더 설명할 필요 없겠다.
야스히로 스즈키의 채소 그릇을 보자. 채소 그릇인데 양배추처럼 생겼다. 이걸 감성 디자인이나 그린 디자인이라는 말로 설명을 다하려는 것은 좀 무리다. 로젠탈이나 웨지우드에서 나오는 그 찬란한 문양의 아름다운 접시를 마다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양배추 모양으로 도자기를 만들었을 때는, 적어도 백남준이 뉴욕 한복판에서 피아노를 부수었던 것에 육박하는 파격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양배추 모양의 그릇도 만들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만드는 이의 정성과 숙련된 기술이 베풀어진 일반적인 고급 도자기에 비해서 이 그릇은 그렇게 고생스럽게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대신 이 그릇에는 양배추라는 자연물과 그릇이라는 인공물 사이를 구분 짓지 않으려는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의 눈이 아니라 머리를 자극하면서 들어오고 있다. 공예적인 성격이 강한 그릇과 차별화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손의 노력보다는 머리의 노력이 더 많이 들어간 매우 지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디자인은 단지 모양이나 제작의 노고보다는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에 의해 질이 좌우된다. 그것을 ‘추상예술’, ‘개념예술’이라고들 부르는 모양이다.
이 그릇을 디자인한 야스히로 스즈키는 말하자면, 이런 말을 하고픈 것이었을 게다. 물건이란 사람들이 쓰라고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것이 꼭 자연을 배척하는 인공품이 되어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디자인이 기능만을 생각한 나머지 자연을 뒤로한 감이 있는데, 이제는 인간만을 생각하는 기계적 기능보다는 자연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디자인이 하인처럼 물건을 쓰는 주인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협소하게 존재하여서는 안 되고, 인간이 속해 있는 대자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는 현명한 제안을 하고 있다. 단지 디자인을 장사 도구로만 생각하는 우리에 비해 일본은 이미 디자인을 철학적 성찰의 원천으로 승화시켜 다루고 있다. 과연 어느 나라 디자인이 돈을 더 잘 벌까? 그리고 어느 나라 디자인이 더 오래도록 좋은 이미지를 주면서 사람들의 삶에 남아 있을까?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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