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나무에 고전적인 모양의 등받이만 끼웠다. 이게 뭐란 말인가?
디자인이라고 하면 순수미술과는 달라야 한다는 어떤 고정 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디자인에서는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이 오롯이 디자인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무슨 말인가?
디자이너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만들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디자인이라면 모름지기 사용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미술처럼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 자랑일 수 없다. 윤리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관계로 디자인은 순수미술과 달리 옛날부터 사용성이라는 굴레(?)를 족쇄처럼 차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모양도 반듯하고, 합리적인 경향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와중에 디자이너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누그러뜨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런 순수미술품 같은, 설치미술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모양들이 순수미술이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명패를 걸면서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통나무 덩어리가 벤치로 그냥 사용하기에는 좀 인체공학적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의 세심한 배려가 들어가 있는 기존의 디자인에 비해서 디자이너의 무성의한 디자인 태도가 지적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상은 정반대다. 디자인의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꾸었다고 세계 디자인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회사에서 수 십 년을 몸 바쳐 디자인을 해온 사람들의 어깨를 하루아침에 푹 눌러 초라하고 남루하게 만들어 줄만 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 통나무 덩어리가 우리에게 어떤 물리적 편의를 주는가 보다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들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동안 디자인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만 주력해 왔다. 칫솔은 이빨 닦는 데에, 의자는 앉는 데에, 핸드폰은 전화 거는 데에만 집중해 왔다. 하지만 이런 기능적 수행은 사람을 중심으로해서 보았을 때 일정한 영역에서만 자기의 헌신을 노력했을 뿐이었다.
최근 디자인이 바라보고 있는 부분은 바로 사람의 마음,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의 마음에 디자인이 기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것일까? 바로 이런 관점에서 디자이너들은 물리적 헌신보다는 정신적 헌신을 디자인의 주요 과제로 삼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통나무에 등받이. 그냥 보면 설치미술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디자인인 이유는 의자라는 기능성에 기반을 두고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자의 기능성. 그것이 꼭 사람의 허리나 엉덩이에만 중점을 두어야 한단 말인가? 사람도 생명체의 그물 속에 있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다면 이런 인간이 쓰는 물건도 인간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헌신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해 있는 생태구조.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디자인은 재료를 인간에 맞추어 극단적으로 가공하기 보다는, 자연에 맞추어 적당히 가공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통나무 덩어리는 바로 그런 말을 하면서, 온갖 첨단기술과, 온갖 화려함을 갖추고 있는 디자인의 모자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디자인을 상품으로만 보고 기업에 헌신하기만 한 디자인, 사람만 보고 기능에만 헌신한 디자인.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뒤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적인 장식의 등받이를 자연 통나무에 박아 놓은 것도 고전주의적 장식에 대한 부드러운 비판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디자이너가 만든 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많은 디자인이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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