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스 러브그로브, 제스퍼 모리슨, 론 아라드와 같은 첨단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끊임없이 쏟아내면서 영국의 디자인 파워를 세상에 드높이고 있지만, 런던의 진정한 디자인 파워는 오래된 뒷골목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회색 빛 하늘과, 회색 빛 건물들로 채워진 런던의 도심을 생각하면, 그 안을 가로지르는 버스가 왜 빨간색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두운 안개나 구름 속을 지나면서도 자기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빨간색 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도로를 채우는 빨간색 버스들의 돌진이 약간은 부담스러운 면도 있지만, 빨간색 2층 버스의 귀여운 비례는 가까이서 보더라도 장난감 자동차를 연상케 하는 바가 있어 도심의 분위기를 한껏 부드럽고 재미있게도 하고 있다. 물론 다른 나라 버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화끈한 색깔로 우중충한 도시의 빛깔과 극하게 대비시킨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런던의 도심을 돌아다니다 버스 뿐 아니라 유독 붉은 색이 들어가 눈을 확 뜨이게 하는 디자인들이 많다. 하얀색과 붉은 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지하철 차체의 빨간색도 버스의 빨간색과 다르지 않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기차길옆 오막살이 같은 펍의 빨간색 입구와 기타 부분들은 낡은 벽돌들과 기차가 바로 위로 지나간다는 불리한 점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과연 그 어떤 첨단 건물이 이처럼 고풍스러운 세월의 때를 간직할 수 있을까? 그런 고풍스런 때 위를 장식하고 있는 빨간색은 그 어떤 럭셔리한 빨간색보다 귀티나고 화려해 보인다. 오래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모여서 그저 그런 새 것이 도저히 흉내내지 못하는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펍이라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기차의 덜컹거림과 소음도 고전음악으로 들릴 것 같다.
먼지 나는 전통의 흐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계문명의 꽃을 가장 먼저 피운 곳이 영국이라는 것을 알면, 영국은 최첨단 재료와 기술을 가진 디자인 보다는 고색창연함과 새 것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디자인의 씨너지 효과에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을 도심을 뒤지고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 사실 그렇다. 우리의 눈을 자극하는 것은 대부분 낡은 것과 어울려 있는 새 디자인의 자태들이다. 대비가 되니 더 눈에 띄는 것은 일리가 분명 있는 일이다.
영국의 그래픽 디자인은 나름대로 국제적인 명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런던의 타워 브리지 아래의 고풍스런 굴다리 길을 걷다보면 영국의 그래픽 디자인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뺀질뺀질한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이처럼 오래되고 너저분하기까지 한 골목길에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낡은 타일들 사이로 강한 색상과 심플한 글자로 이루어진 카페의 간판이자 안내판의 현대적 처리가 빛을 발하고 있다.
아울러 오래된 것도 새것과 대비를 이루어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 않고 당당하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새 것 앞에서 초라하지 않는 헌 것이, 이제 우리 곁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물게 되어버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점에서는 영국의 디자인이 부럽다.
런던의 뒤 골목을 차지하고 있는 고풍스런, 아니 낡아빠진 건물들은 우리의 시각에서는 빨리 없애 버려야 할 애물단지이건만 창문의 처리나 옥상이나 건물의 부분만 바꾸어 주어도 낡음에 신뢰를 부여하고 새것에 무게를 더할 수 있다. 무조건 부셔버려야 했을까? 낡은 것이 새것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광이 더없이 편하고 아름답다. 이런 곳에 산다면 아무리 작고 낡은 곳이라도 누추하지 않고 편안할 것 같다.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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