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주인이 많은 발해는 우리의 아픈 상처다.
블라디보스톡의 한 박물관(museum of ARSENYEV)에서 1300여 년 전의 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이 나라 잃은 한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화려한 역사의 증거였다. 그 ‘증거’를 지금 보전, 전시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인들이다.
발해는 한반도 북부의 대부분과 요동·흑룡강 이남 및 연해주까지 통치했었다. 지금의 국경선으로 볼 때 북한 지역과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를 아울러 우리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룩했던 나라였다. 그 영토가 통일신라보다 4~5배나 컸고 고구려보다도 1.5~2배정도 컸던 왕조라고 한다.
최근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국사의 왜곡이 새로이 제기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하고자 하면서 발해 역시 그 안에 끌어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1860년의 베이징 조약에 의해 연해주가 러시아로 넘어 감으로써 해당 지역의 발해는 러시아의 일부가 되어 우리 ‘역사’가 그 나라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자기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주인이 많아진 것이다.
아릿한 마음으로 옛 우리 조상의 체취를 느껴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자기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은 했으나, 발해가 다스리던 지역의 경계선이 표시된 지도와 그 지역의 주인공을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지역을 다스리던 주인공은 바로 쌍용총 벽화의 기마상이었다. 조우관을 쓰고 통 넓은 바지(고袴)에 저고리(유襦)를 입고 말을 탄, 틀림없는 고구려 귀인의 모습이었다.
바지와 저고리는 북방 유목 민족의 대표적인 옷이나, 무엇보다 조우관(鳥羽冠)은 고구려의 상징적인 귀인 계급의 관모였다. 조우관은 변형(弁形)의 작은 모자(절풍이라고도 함)를 정수리에 쓰고 수직으로 좌우에 새의 깃털을 꽂고 턱 아래에서 끈으로 묶는다.
깃털이 좌우에 달리지 않고 여러 개를 한 다발로 꽂은 모습이 새의 꼬리 같아서 조미관이라고 하는 것도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유목 생활을 하던 고구려인들이 사냥에서 얻은 새의 깃털을 관모 좌우에 꽂았으나, 생활이 안정되고 계급이 구분되면서 계급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삼국이 다 같이 이 조우관을 썼다고 보며, 통일신라 시대의 사신이 그려져 있는 사마르칸트 압프라시압 궁전 벽화나 당나라 이현묘의 사절도 조우관을 쓰고 있다. 어찌되었든 이 조우관이 우리 조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관모임에 틀림이 없다.
바지도 그렇다. 북방 호복계(北方胡服系)의 옷인 이 바지도 러시아 인의 바지가 아닌 것은 물론 중국 문화의 주체였던 한족(漢族)의 옷도 아니다. 중국에서 바지를 받아 입기 시작한 연대는 BC 2~3세기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발해의 역사가 698년부터 926년까지 이므로 한족들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시기이지만, 이들은 바지 위에 상의하상식 (上衣下裳式 위 아래가 연결된 포 같은 옷)의 것을 입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저고리를 입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중국인일 가능성도 낮다.
즉 옷이나 관모로 보아 틀림없는 고구려의 후손이다. 발해는 바로 그 유민들이 세우고 역사를 이루어낸, 우리 조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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