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엄격하되 액세서리로 재미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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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거펠트 5

2010-10-01 오후 6:38:51



지난 호까지 칼 라거펠트가 맡은 샤넬과 펜디의 디자인을 살펴봤다. 워낙 세계적인 브랜드들이라 정작 칼 라거펠트 본인의 컬렉션이 묻혀 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샤넬은 프랑스 브랜드, 펜디는 이탈리아의 브랜드 아닌가.

이런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지휘하고 있는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독일인이다. 샤넬과 펜디 컬렉션만 보면 칼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게 된다. 그렇다면 칼 라거펠트 라인은 어떨까?

독일의 회색 vs. 이탈리아의 회색 
디자이너에게 있어 색(色)이란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다. 따라서 다양한 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나 이렇게 색 잘 쓰는 사람이야’ 를 드러내거나 아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른 부분, 예를 들면 실루엣이나, 옷의 구조, 소재 등에 시선이 가도록 하거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공고히 하는 방편으로 사용된다. 한 가지 색을 밀면서 그 색을 보면 그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생각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색으로만 보면 라거펠트는 분명 독일인이 맞다. 검정색, 짙은 회색 등 굉장히 제한적으로 색을 쓴다. 그런데 무채색도 색이 없을 뿐이지 그 명도의 스펙트럼 범위는 크며, 아주 저채도의 색은 회색처럼 탁하다고 느껴지지만 그 본연의 색 이미지가 드러나면서 회색에 개성을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라거펠트의 회색은 아르마니의 회색과 다르다. 라거펠트나 아르마니 모두 회색을 많이 사용하지만 아르마니는 좀 더 높은 명도의 회색을, 그에 비해 라거펠트는 저명도의 회색을 사용한다. 게다가 아르마니의 회색이 이탈리아 대리석 같은 느낌이라면 라거펠트의 회색은 기계나 금속성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 잘라서 공식마냥, 고명도의 회색은 따듯하고, 저명도의 회색은 차갑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채색인 회색에 조금이라도 색이 섞이면 그 첨가된 색의 인상이 은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중성적인 회색에 빨강과 파랑이 각각 조금씩이라도 섞이게 되면 웜 그레이(worm grey)와 쿨 그레이(cool grey)처럼, 따듯하거나 차가운 경향을 갖게 된다. 게다가 인상은 색만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색만으로 국가 정체성이 묻어나는 것이 아니다. 선(線)에서도 그 차이가 드러난다. 딱딱한 직선을 쓰느냐, 부드러운 곡선을 쓰느냐의 차이를 살펴보자.

독일의 선 vs. 이탈리아의 선
이번에는 거의 비슷한 명도의 회색을 사용한 라거펠트의 디자인과 아르마니의 디자인이다. 그런데도 아르마니의 디자인은 우아한 멋쟁이 이탈리아인처럼 보이고 라거펠트의 디자인은 강직한 엔지니어 독일인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라거펠트의 옷에는 정확한 재단을 바탕으로 한 직선적인 선들이 많다. 재킷의 칼라나 네모반듯한 주머니, 게다가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재킷과 위협적인 귀고리, 헤어스타일은 더더욱 권위적이고 강직한 인상을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여성적인 신체적 특징을 가린 옷의 실루엣도 그렇다. 남성적으로 보이는 넓은 어깨와 가려진 허리로 인해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으로 보이는 모델의 신체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최종적으로 독일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나오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르마니의 디자인은 어떨까? 비록 어깨는 직선적으로 각이 졌지만 둥글게 목을 타고 내려오는 재킷과 블라우스의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 비대칭형으로 매치된 모자와 브로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실루엣 등이 합쳐져 다시금 이탈리안의 감성이 흐르는 옷이 완성되었다.

단도직입적 표현 vs. 계산된 은유적 표현
액세서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둘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라거펠트가 딱딱하고 직선적인 이미지를 옷으로 표현했다면 액세서리로 약간의 유머를 첨가하여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 유머의 방식이 좀 단도직입적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라거펠트의 여성상은 좀 남성적이고 강인하다. 그런 강인함을 색, 실루엣, 직선으로 실컷 표현하고도 모자랐던 것일까. 사진 ③-1의 의상은 라거펠트를 대표하는 검정 재킷과 흰색 셔츠, 거기다 검정 넥타이까지 멘 여성이다.

재킷의 칼라는 마치 남성의 잘 키운 승모근 마냥 목에서 바로 어깨 끝까지 대각선으로 떨어지면서 더욱 남성적인 인상을 만든다. 거기에 넓은 벨트를 매치했는데 그 벨트에 조로록 작은 화살이 장식되어 있다. 적이 나타나면 바로 꺼내 쓰려고 비축해 둔 것일까?

사진 ③-2도 같은 방식이다. 넓은 천으로 수직적 어깨를 강조한 원피스에 벨트를 매치했는데 마치 도끼를 허리춤에 찬 듯 벨트 안으로 반쯤 들어가 있다. 그것은 마치 ‘나 어깨도 넓고 힘도 좀 셈. 게다가 이런 무기도 있음’이라는 문장을 옷으로 바로 표현한 것과 같다. 게다가 화살과 도끼를 추상화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미니어처를 만들었다. 한데 그게 앙증맞아서 오히려 귀여움을 유발한 달까. 그에 반해 아르마니의 표현방식은 은유적이다. 디자이너들이 옷에 포인트를 주려고 과한 액세서리를 매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큼지막한 귀고리나 목걸이는 남성에게 그다지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앞의 사진 ②에서 칼 라거펠트의 모델이 귀고리를 대칭적으로 했을 때 얼마나 위협적인 인상이었는지 상기해보자. 이 위협적인 인상이 남성에게는 더욱 비호감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아르마니는 옷에서 부드럽고 곡선적인 우아함을 추구하는 대신 큼지막한 액세서리를 매치하여 마냥 유약하지만은 않은, 강인한 여성성을 표현하고 있다. 대신에 언제나 액세서리는 비대칭으로 들어간다. 비대칭이란 이렇게 큼지막한 액세서리로 시선을 끌면서도 이성에게 위협적이거나 비호감을 주지 않는 숨겨진 비밀 병기이다. 엄청난 계산의 결과는 이렇게 고급스럽게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그러고 보면 제왕적 이미지의 칼 라거펠트는 오히려 순수했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아르마니는 엄청나게 계산된 결과였던 셈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배지에 넣은 칼은 제왕이라기보다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작은 부탁인 것 같아 왠지 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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