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을 지휘하고 있는 칼 라거펠트는 어떻게 코코 샤넬의 정신과 디자인을 계승하며 발전시켜 나가는가. 지난 호까지는 샤넬의 대표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현대화하였는지,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하였는지 살펴봤다. 하지만 샤넬만으로 그가 패션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은 뭔가 아쉽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가 40여년이 넘도록 디자인을 맡고 있는 펜디와 칼 라거펠트의 컬렉션을 살펴보면서 그의 호칭의 당위성을 느껴보자.
제한적 색으로 표현되는 다양함
칼 라거펠트는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를 즐겨 입는다. 그를 떠올릴 때면 얼굴의 반을 가리는 큼지막한 검정 선글라스와 하얗게 센 머리로 묶은 말총머리, 혹은 새하얗게 잘 관리된 목까지 바짝 올라온 높은 칼라의 셔츠와 대비되는 검은 수트가 생각난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의 고유한 브랜드 칼 라거펠트나 그가 수년 간 이끌어 온 펜디의 대부분의 의상도 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검정과 하양, 그 사이의 무채색, 또는 회색만큼 중성적인 갈색 정도다. 하지만 제한적으로 색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옷들이 뻔하거나 진부하지 않다. 다양한 형태로의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기도 하지만 그 네 가지 색을 잘 변주하여 수십만 가지 인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사진①-1의 검정과 하양으로 이뤄진 의상은 칼 라거펠트의 정체성이 잘 드러난다. 가장 명도대비가 강한 두 색을 사용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색의 조합은 너무 흔하게 사용돼 참신함을 잃기 쉽다. 따라서 그는 패턴의 변화로 그것을 극복했다.
재킷의 끝단이 위로 말려 올라간 형태이다. 게다가 소매를 떼어버려 기존의 재킷이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베스트라고 하기도 애매한 새로운 형태이다. 이렇듯 색만 보면 진부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와 결합하는가에 따라 고리타분해지거나, 세련돼 진다. 칼은 단연 후자다.
사진①-2는 전체적으로 짙은 명도의 회색 새틴 드레스이다. 완전한 검정보다 이런 저명도의 색이 더 풍부한 인상을 자아낸다. 이 의상도 보기에 따라 보라색을 머금은 것 같다. 이 드레스가 풍부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벌의 드레스에 다양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깨와 가슴부분, 허리는 반짝이는 보석장식과 오뜨 꾸튀르적 디테일은 동화 속 공주 같은 화려함을 드러낸다. 팔을 거의 감싸는 긴 장갑도 그러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거드는 듯 하지만 어쩐지 가죽 같은 질감과 손끝이 드러나는 형태는 오토바이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앞이 트인 드레스 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늘씬한 다리에 여성스러운 구두가 아니라 가는 주홍색 선이 들어간 레깅스와 부티이다. 헤어 스타일은 결코 동화 속 공주님풍이 아니다. 결국 이 한 벌의 의상에는 공주님과 바이크 라이더처럼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가 들어있는 것. 즉, 다양한 색이 아닌 이미지로써 풍부한 인상을 가지게 된 경우이다.
다음 사진은 검은색만으로도 화려한 옷의 예이다. 어떻게 검은색의 옷이 화려해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소재를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같은 검은색이라도 모든 빛을 흡수하여 광택이 없는 경우와, 광택이 있어 빛을 반사하는 경우, 속이 비치는 소재와 비치지 않는 소재, 질감 차이 등으로 다양한 대비 효과를 내면서 한 가지 색으로도 단조롭지 않은 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진②-1의 경우 코트와 안에 입은 원피스, 구두까지 세 아이템 모두 검은색이지만 모두 다른 질감으로 대비되고 있다. 털의 길이가 길어 풍성해 보이는 코트와 단순하지만 약간의 광택이 있는 원피스, 송치 질감의 부티까지 각각의 빛 반사 정도가 다르다.
사진②-2의 경우는 새틴, 쉬폰, 모직 등 다양한 소재가 중첩된 원피스의 깊이감과 가죽 부츠 1차원적 질감이 대비된다. 다시 말해 원피스의 경우 비치는 소재와 비치지 않는 소재, 표면이 독특한 장식이 된 소재 등 여러 인상의 소재가 층층이 겹치면서 깊이감을 주면서 시선이 여러 번 원피스를 훑는데 비해 부츠는 한눈에 가죽소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사진②-3은 단순히 검은색의 코트와 부츠 같지만 또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우선 코트는 특별한 질감은 없다. 하지만 코트의 구성이 복잡하다. 부드러운 선으로 목을 감싸는 칼라와 그 선에 이어져 어깨를 감싸는 케이프 부분 아래로 소매와 몸판 부분까지 면이 네 개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코트가 몸판과 소매가 하나의 통으로 보이는데 비해 이 코트는 3층, 4층으로 겹쳐지기 때문에 이 또한 중첩적인 깊이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여기에 어깨부분에 덧댄 가죽으로 한 번 더 작지만 시각적인 충격을 주면서 같은 검은색이라도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칼 라거펠트는 검정색만으로도 변화무쌍한 인상을 구축해 가고 있는 것이다.
펜디와 칼 라거펠트
펜디는 1925년 설립되어 새로운 가죽 가공법 등으로 모피 제품의 큰 변화를 가져왔고 1965년부터 칼 라거펠트와 손잡아 지금껏 발전해 왔다. 어찌 보면 샤넬이라는 거대한 브랜드에 가려져 펜디와 칼 라거펠트와의 관계는 쉽게 간과한 듯하다. 어쨌거나 모피 전문 브랜드의 디자인을 맡아오면서 그의 취향은 더욱 견고해 진 듯하다. 모피라는 재료를 칼은 또 어떻게 요리하고 있을까.
40여년이라는 세월에 이미 그에게 모피에 대한 모든 실험을 끝냈을 듯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름답고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고 있다. 사실 모피나 가죽의 재료 자체가 고가이고 그러다보니 대중적으로 흔한 질감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옷감으로 만들었다면 평범했을 의상도 모피나 가죽이 들어가면 특별해 보이는 현상도 없잖아 있다.
사진 ③-1과 ③-2의 경우가 그렇다. 평범한 재료로 만들었으면 평범해 보였을 법한 의상도 새로운 재료와 만남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출해 냈다. 털이 복슬복슬한 원피스와 그에 비해 밋밋한 울 소재는 그 시각적 부피감과 무게감, 광택에서 차이가 있어서 ③-1에서는 옷 자체만으로 풍성한 느낌을 내지만 ③-2는 팔찌와 어깨의 모피 트리밍을 자꾸 덧붙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사진 ③-3의 가방은 은근하게 부유함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적으로 어느 누가 가방 안감을 모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과 실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움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40년 이상 모피와 가죽을 갖고 놀아본 칼 라거펠트만이 할 수 있는 디자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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