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칼 라거펠트를 빼놓고는 샤넬을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샤넬의 수장이 된지도 20여년. 그동안 변한 것은 칼의 주름과 몸무게뿐일까. 샤넬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칼 라거펠트의 샤넬 컬렉션을 살펴보자.
블랙 & 화이트 대비 뚜렷
검정색은 많은 디자이너들이 선호하는 색이다. 누구라도 세련되고 현대인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색이다. 이러한 검정색을 여성의 일상복으로 끌어들인 디자이너가 코코 샤넬이다. 이유는 많다. 어린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그녀는 끊임없이 검정색의 수녀복을 보았고, 그와 맞물려 전쟁 기간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늘어나면서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옷보다는 때가 잘 타지 않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의 의상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이 그녀의 미감(美感)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그녀가 만든 단순한 검정 원피스는 여성복의 현대화에 가속도를 붙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돌체 & 가바나가 쓰는 검정색과 레이 가와쿠보가 쓰는 검정색, 샤넬의 검정색은 엄연히 다르다. 모두 검정색을 쓰지만 보는 순간 어느 디자이너의 옷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각 디자이너 고유의 특징적인 패턴에 따른 형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검정색이 어떠한 색과 함께 쓰였는가에 의해 1차적으로 판단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샤넬의 검정색이 샤넬 같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흰색과의 매치 때문이다. 그것도 검은 색과 하얀 색이 비슷한 비율로 있을 때 보다 일부 끝에만 사용했을 경우 더욱 그렇다.
사진 ①은 블랙 & 화이트로 구성된 원피스이다. 수녀복을 연상시킬 정도로 경건해 보이지만 은근한 화려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액세서리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상체만 봐서는 목 위까지 세워진 하얀 칼라, 그리고 그 안으로 검정의 천이 보인다. 혹여 살이 조금이라도 보일까 조심스러워 하는, 종교 의식 때 입을 것 같을 정도로 상체를 꽁꽁 싸맸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선 살은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맸을 망정 여성의 신체적 특징인 가슴과 허리, 엉덩이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리와 발도 검정색으로 통일했지만 치마의 트임이 앞 중앙에 있어 섹시함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 통일된 다리의 검정색은 이 옷을 천박해 보이느냐 아니냐로 가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만약에 스타킹이 검정색이 아니었다고 상상해보자. 어떤 색이와도 가장 어두운 명도의 검정과 대비되어 다리가 강조되면서 첫인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상체는 단정한 수녀인데 하체는 이성을 유혹하는 이중적인 인상을 풍겼을 것이다. 색으로써 노골적이냐 은근하냐, 우아하냐 천박하냐의 차이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천으로 얌전히 감싸인 목과는 다르게 마치 깃털처럼 하나하나 나풀대는 손목 장식은 원피스의 본판인 검정과 명도 대비가 가장 심한 하얀색으로 더욱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있지만 요소 하나하나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반짝거리는 보석장식 없이 깊숙한 내면에서 올라오는 우아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진 ②는 조금 더 화려해진 블랙 & 화이트 원피스다. 사진 ①과 하체 처리는 같다. 하지만 상체의 목, 가슴과 팔목 부분에 질감을 줘 더욱 단색의 검정과 대비됨으로써 화려함이 느껴지게 된다. 게다가 일반적인 프릴 장식이 아닌 샤넬의 상징인 동백꽃으로 장식함으로서 샤넬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확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사진 ③의 검정색 원피스는 안감의 하얀색이 조금씩 비치면서 마치 쇠창살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듯 반짝거림이 느껴진다. 목과 손목의 장식도 하양의 주름장식과 투명한 검정색을 겹겹이 더해 전체적으로 화려한 인상을 준다. 특이한 것은 모델의 포즈인데, 자세히 보면 그녀는 반지를 대칭으로 착용했다. 중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똑같은 반지를 양손에 낀 것이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오기 시작한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대칭적인 형태는 안정감을 준다.
따라서 세상의 대부분의 물건은 대칭 형태를 띤다. 특히나 각이 진 대칭 형태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교장 선생님 같은 권위적인 인상을 준다. 성냥갑 같은 직육면체의 건물이나 어깨의 각이 세워진 재킷이 그러하다. 마치 칼 라거펠트의 근엄하고 엄격해 보이는 성격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게다가 칼라와 커프스가 강조된 의상은 마치 칼 라거펠트 자신을 복제한 패션쇼라는데 확증을 준다. 칼 라거펠트의 다큐멘터리에 잠시 보이던 탈, 부착이 가능한 수많은 칼라와 커프스, 그의 항상 흐트러짐 없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부분을 차지하던 것들이 이런 식으로 샤넬 패션쇼에서 재현된 것이다. 샤넬과 칼 라거펠트의 상징적인 블랙 & 화이트 아이덴티티가 자연스럽게 융합된 패션쇼였다.
아름다움과 실용성, 두 마리 토끼 잡다
샤넬이라는 브랜드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왜 샤넬은 전 세계 여성의 로망이 된 것일까? 지금에야 고가의 명품 이미지로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사실 코코 샤넬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편안함과 실용성, 그러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현대 여성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브랜드 샤넬의 대표작들을 언급할 때 2.55백, 트위드수트, 진주 목걸이, 투톤슈즈와 더불어 빠지지 않는 것이 코스튬 주얼리이다. 즉 진짜 보석들을 사용하지 않고 유리 등의 인조보석을 사용하여 장신구를 만드는 것이다. 진짜 보석으로 사진 ④처럼 가슴부분을 뒤덮는 목 장신구를 만들었다면 가격은 상상도 못할뿐더러 평소에는 하고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물이 튈까, 흠집이라도 날까해서 상전으로 모셔야 될 것이다.
샤넬이 코스튬 주얼리를 만든 시대도 그랬다. 전쟁도 문제였고 귀족만이 아닌 일반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도 문제였다. 게다가 그녀는 액세서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디자이너였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액세서리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기 위해서도 그녀는 진짜 보석이 아닌 모조 보석으로 액세서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진 ⑤의 모델은 마치 꽃이 달린 나뭇가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목걸이를 하고 있다. 칼 라거펠트는 이러한 코코 샤넬 여사의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모델의 허벅지를 자세히 보라. 이 할아버지의 코스튬 주얼리에 대한 재치 있는 재해석을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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