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수트에 백발의 짧은 말총머리, 검은 선글라스, 손등이 파인 장갑.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바로 떠오를 인물. 여성들의 로망, 명품 중의 명품 샤넬의 수장을 맡고 있는 패션계의 전설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다.
샤넬과 펜디, 끌로에 등 누구나 알 만한 세계적인 브랜드들을 이끌어왔으며 여전히 멋진 모습으로 패션계의 최정점에서 군림하고 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올라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수수께끼의 사나이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자신은 1938년에 태어났다고 하나, 세례명의 기록으로는 그보다 5년 빠른 1933년이라고 되어 있다. 언제 출생했던 간에 70세가 넘어서도 아직까지 패션계의 최정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의 최근 다큐멘터리에서는 그가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아버지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러시아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 출신이라고 소개되었다. 하지만 또한 아버지가 독일에 연유를 공급하였던 스웨덴 비즈니스계의 거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냥 독일 지방의 평범한 중산층 출신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칼이 어린 시절부터 굳건했던 디자이너에의 의지를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1953년 그는 어머니와 파리로 이주하였고 2년 후인 1955년, 국제 양모 사무국(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코트 분야에서 우승을 하여 피에르 발망의 사무실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드레스 분야에서 우승했던 이는 이브 생 로랑이었고 그는 크리스챤 디올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알제리에서 온 이브 생 로랑과 전쟁 후 독일 출신의 칼 라거펠트는 둘 다 지방 중산층 출신으로 언젠가 파리로의 화려한 입성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둘 다 사춘기 시절을 빠리의 꾸뛰리에 양성소에서 보냈으며 IWS 공모전 이후로 라이벌 관계가 지속된다. 당시 가장 잘 나가던 패션 하우스였던 크리스챤 디올에 들어간 입 생 로랑에 비교해, 사실 그저 그런 패션 하우스를 전전하던 칼 라거펠트는 같이 공부해 온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했을 만 했다.
하지만 과정상으로는 라거펠트가 입 생 로랑보단 성공의 길에 뒤늦게 합류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라거펠트가 최후의 승리자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길고 끈질긴 관계는 2008년 입 생 로랑이 영면에 들면서 끝났고, 칼은 여전히 패션쇼를 지속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기의 라이벌, 이브 생 로랑
발망에서 3년을 보낸 후 장 파투로 옮겼고 그 뒤 오뜨 꾸튀르 하우스보다는 기성복을 만드는 회사의 프리랜서로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패션 업체인 크리지아, 제화 업체인 찰스 주르당에서 프랑스 수퍼마켓 체인업체인 모노프리까지 이른다.
이브 생 로랑은 58년 갑자기 타계한 크리스챤 디올을 대신하여 디올 하우스를 맡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오뜨 꾸튀르계를 이끌어 가고 있을 때, 라거펠트는 오뜨 꾸튀르의 종말을 예고하며 프리랜서로 기성복을 디자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 이브 생 로랑이 피에르 베르제와 손을 잡고 자신 고유의 브랜드를 만들며 더욱 패션계에서 그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을 때, 칼은 디자인계에 환멸을 느끼고 예술 공부를 하러 이탈리아로 갔다. 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967년 이탈리아 모피 업체인 펜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샤넬의 총괄 디자이너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는 펜디와 더 오래 전부터 같이 일 해왔으며, 지금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또 한 가지 1964년 그에게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끌로에에서도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끌로에의 설립자 개비 아기온(Gaby Aghion)은 기성복 업체인 끌로에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기성복 패션쇼, 즉 프레타 포르테를 만들고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에야 우리에겐 오뜨 꾸튀르보다 프레타 포르테가 더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기성복 패션쇼란 진화 된 패션의 형태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성복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먼저 예감한 칼 라거펠트는 개비에게 오뜨 꾸튀르와는 다른 기성복에서의 유의점들을 배우며 점점 성장해 갔다. 1970년대 끌로에는 칼 라거펠트가 디자이너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는데 큰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공은 후에 그가 샤넬의 수장을 맡게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83년 칼 라거펠트는 끌로에와 결별하고 샤넬로 옮겨가게 된다. 그 해 칼 라거펠트는 샤넬 오트 꾸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양 부문 패션쇼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가브리엘 샤넬이 죽은 뒤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잊혀져 가던, 전설에서나 찾을 수 있는 옛날 브랜드로 남을 뻔 한 샤넬은 칼 라거펠트를 아트 디렉터로 영입한 이후 완벽히 부활하게 된다. 젊은 시절 꾸튀르 패션을 연마하고 새로운 패션의 영역을 누구보다도 먼저 개척하고 성공했던 칼 라거펠트 만큼 샤넬에 적합한 인재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노력과 재능, 그리고 시대를 예견하고 그에 맞게 발전해 온 그의 통찰력, 이 3박자가 잘 맞았기 때문이다.
제왕의 유머감각
칼 라거펠트는 20년 가까이 샤넬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펜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칼 라거펠트’까지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정갈하고 단단한 그의 패션세계와 이런 초인간적인 능력들이 더불어 그는 오랫동안 패션계의 제왕이라는 이미지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진지하기만 한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의 패션 중에는 유연한 감각이 발휘되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모든 여성들의 로망인 샤넬의 2.55백. 클래식한 모양이지만 현대 여성들에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칼은 어떤 방식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2.55백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사진②를 보면 같은 모양의 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들고 나온다. 2.55백을 포함한 샤넬의 향수와 화장품들, 아이팟 등 여성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아이템들을 투명한 가방에 넣어 들고 나오기도 하고, 가로로 긴 가방을 세로로 세워서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변화가 야기하는 신선한 충격과 여성의 마음을 꼭 읽어낸 듯한 아이디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2.55백의 명성에 어떤 흠집도 내지 않으면서도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하게 만들어 준다. 간단한 방법으로 익숙한 가방을 새롭고, 놀라운 모습으로 다시 보여준 칼 라거펠트의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들은 그가 여전히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며 그의 패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한지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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