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해체적 변주에 능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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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원이 바라본 패션 디자이너의 세계 ⑫ - Jean Paul Gaultier (1952~)

2010-05-24 오후 1:55:59


최고가의 브랜드 에르메스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장 폴 고띠에는 살펴본 바와 같이 비교적 안전하고 격조 있는 디자인으로 브랜드를 잘 이끌고 있다. 에르메스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를 자기의 개성에 맞게 재활용하며 고전적 이미지에 세련된 변화를 첨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장 폴 고띠에를 아는 사람이라면 성질(?) 참 많이 죽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원래 이렇게 얌전하고 철이 든 디자이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 브랜드를 보면 장 롤 고띠에는 과거의 유산을 결코 얌전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여자
장 폴 고띠에 하면 아직도 자연스럽게 마돈나와 콘 브라가 연상된다. 최근 장 폴 고띠에는 이런 콘 브라를 다시 부활시켜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고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모양이지만 여성의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을 원뿔 도형으로 치환한 콘 브라의상은 란제리를 아웃웨어로 꺼내 입었다는 의미로도 사회적인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킬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의상이 충격적인 것은 비단 속옷을 바깥으로 꺼내 입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부드럽기 짝이 없어야 할 여성의 가슴이 공격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 또한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여성에 관한 상징적 이미지가 한 번에 깨져 버린 것이다. 예컨대 여성의 가슴은 아기를 위한 모성의 상징이기도 한 동시에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하다. 가슴의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은 그런 가슴의 속성을 푸근함, 풍요, 안식처, 부드러움 등의 이미지로 극대화한다.


그런데 가슴 위에 원뿔의 형태가 씌워짐으로써 가슴은 이런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편에 있는 공격적 성향으로 중무장하게 된 것이다. 바닥에 세워진 원뿔은 부드럽고 안정적인 모양이지만, 90도로 세워진 원뿔은 언제든지 달려들 것 같은 공격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가슴이 숨겨져 있더라도…


여기에 새틴 재질의 광택은 안 그래도 공격적인 인상에 금속성의 차갑고 단단한 느낌을 부가하여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고 있다. 중세 기사의 갑옷과 창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형태에서는 공격성, 돌진력이란 단어가 자연 떠오른다.


게다가 기하학적 도형, 자연의 것이 아닌 무생물, 마침내 로봇의 미사일 장치 같은 기괴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것이다.


곡선의 직선화
곡선 모양보다는 직선적이거나 기하학적 형태가 훨씬 강해 보이는데, 콘 브라 모양 뿐 아니라 천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접히게 만든 부분도 여성스러운 느낌보다는 단단하고 공격적인 인상을 자아내고 있다. 천이라면 당연히 몸 위를 부드럽게 드레이프 지면서 늘어뜨려져야 할 터인데 그림 3을 보면 가슴과 골반 부위의 카울 (여유를 주어 자연스러운 주름이 지게 만드는 것)진 부분이 마치 아이언맨의 철갑외피처럼 기하학적 각을 형성하면서 접혀지고 있다. 이렇게 부드러운 곡면대신 각이 지도록 표현 된 주름은 콘브라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인체를 더욱 강인해 보이게 만든다.


그것이 여성성을 남성성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 그 자체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 장 폴 고띠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여성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이렇게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 것이다. 이렇듯 변형이 되었지만 란제리라던가 드레이프 진 의상은 서양 의복의 근간을 이루는 상징이 강한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보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다. 따라서 일반적 고전주의적 디자이너라면 색이나 소재, 다른 아이템과의 색다를 매치를 통하여 새로운 패션 이미지를 끌어냈겠지만 고띠에는 아주 일상적이고 당연한 듯한 부분 그 자체를 변화시켜서 색다른 표현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주로 그러한 것들을 고전주의적 옷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기발하고 파격적이지만 고전주의적 품위를 손에서 놓치지 않는 것도 장 폴 고띠에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의 격이 또한 그를 위대한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고전주의의 갈래
지금까지 살펴 본 디자이너 중에 고전에 충실한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와 비교해 보면 장 폴 고띠에의 파격적 고전주의와의 차이를 확연히 살펴 볼 수 있다. 즉, 갈리아노가 기존의 고전주의적 패션의 이미지 재해석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한다면 고띠에는 고전을 한 번 해체하여 재해석을 한다. 그림4를 보면 같은 란제리라 하더라도 갈리아노는 단순히 트렌치코트 안에 이너웨어 겸 치마로 란제리 의상을 매치시켜 섹시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고띠에는 그 브래지어의 가장 상징적인 형태를 파괴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띠에의 콘브라는 고띠에만의 시그니처 룩으로 영원성을 부여받았으나 갈리아노의 란제리 룩은 한 시즌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고띠에는 고전을 활용하여 그 자신이 고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갈리아노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010 봄, 여름 컬렉션은 콘브라의 재해석의 장이었다. 그 형태는 오버롤(멜빵바지)의 가슴에도, 엠파이어 라인의 원피스에도 얹혀졌고, 또는 정말 고전적 브래지어의 형태로도 등장했으며, 심지어 엉덩이나 어깨부위를 장식하는 패드로도 활용됐다. 단순히 브래지어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넘어 이젠 고전이 되어 버린 콘브라의 활약이 눈부셨다. 재미있는 것은 콘브라가 정형화 되어 상의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콘브라 상의 안의 또 다른 브래지어가 보이는 것이었다. 란제리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의의 새로운 형태로 당당히 드러난 것이다.


콘브라를 발표한지 10여년이 넘었어도 다시 자신의 상징을 고전으로 삼아 새로운 디자인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 고띠에의 힘이 아닐까. 패션계는 슬프다. 매 시즌 새로운 디자인을 쏟아내야 하고 그 시즌이 지나가면 어느새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그 와중에 자신만의 개성을 유지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각인 시켜야 한다. 자신만의 룩, 자신을 대표하는 룩, 아이템을 갖는 다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매너리즘에 빠지면 그 능력은 금새 잊혀지고 만다. 가수와 비슷하다. 대표곡이 있으면 평생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지만 새로운 음악을 계속 발표하지 못한다면 잊혀진다.


장 폴 고띠에가 놀라운 것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휘발하기 쉬울 수도 있는 디자인을 선보이면서도 그런 살벌한 상황에서 수 십 년을 거뜬하게 견디어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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