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서 ‘고전적이다’, ‘클래식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기존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 여러 군(群)의 사람들, 즉 직업으로 나눈 집단이든, 시대적 양식이든, 또는 민속 복식이든 어떤 정형화 된 이미지를 재사용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움과 익숙함
디자이너가 역사를 공부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받은 영감들, 특히 어떤 복식에서 영감을 받아 그 복식의 특징들을 잘 추려내어 새로운 컬렉션에 잘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을 우리는 고전주의적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이런 디자인 방식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인식을 파고든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그대로 재현 되는 것은 패션에서 의미가 없다. 진부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고전적 이미지를 사용하되 무엇인가 새로움과 결합하여 양면적인 매력을 발산해야만 사람들은 열광한다.
반대로 역사와 전통이 없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온 것 같은 너무 새로운 것에도 사람들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원래 인간이란 새로운 것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가 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익숙해지면 처음의 거부감은 곧 사라지고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긴 어른들은 자신이 보아오던 것과 다른 새로움에 두려움을 많이 느낀다. 반면에 그에 비해 아직 백지 상태여서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어린이나 학생들이 새로운 것에 더 잘 익숙해진다. 이효리의 ‘치티치티 뱅뱅’이나 f(x)의 ‘누 예삐오’를 이해 못하는 어른과 열광하는 아이들의 차이는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물론 그것이 생물학적 나이보다는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클래식 중의 클래식
명품 중의 명품, 에르메스(Hermès)의 디자인은 굉장히 클래식하다. 고전적이다. 컬렉션을 보면 ‘아 이번엔 뭐가 주제구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10년 봄·여름 컬렉션의 주제는 테니스 복 이었다. 새하얀 짧은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테니스 채를 들고 모델들이 무대 위로 걸어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이미지만 가지고는 사람들은 감동받지 못한다. 점차 의상들에 변화가 나타난다. 미니 원피스 위로 겹쳐 입는 긴 치마는 짧은 치마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장점으로 바꿔 줄 만큼 실용적이다. 앞부분은 트여있어 짧은 치마와 긴 치마 사이 다리의 각선미가 돋보일 뿐 아니라 계단을 오를 때의 뒷부분의 신경쓰임은 걱정을 덜 수 있다. 게다가 안쪽의 원피스는 치마가 길이도 짧고 품도 작은 반면에 겉에 겹쳐입는 치마는 길이도 땅에 끌릴만큼 길고 주름 치마의 특성처럼 품도 아주 여유롭다. 이런 치마의 크기 비교에서 오는 대비감도 미적인 감동을 주는데 한 몫 한다.
또한 주름치마의 특징은 골반과 엉덩이 부분은 딱 달라붙고 주름분 만큼 치마단은 여유가 많아 A라인이 된다는 것인데 치마가 길어질수록 그 여유분 때문에 무게감이나 면적감으로 묵직해 보이기 쉽다. 이런 주름치마의 단점을 소재의 변화로 극복했다. 속이 비치는 소재를 바닥면으로 놓고 위에 불투명한 가죽을 덧대 엉덩이와 골반 부분은 자연스럽게 가려지면서 아래 부분에 가벼움을 부여한 것이다. 게다가 에르메스라는 가죽 전문 브랜드의 특징도 고스란히 포함시켜 그 매력을 배가시킨 것이다.
고전성을 바탕으로 한 작은 변화들은 가방에서도 나타난다. 에르메스의 대표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버킨백, 그 가방의 고유한 특징인 잠금쇠 부분은 가방이 열린 듯한 모습을 가죽과 또 다른 소재를 사용해 평면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래픽적으론 가방이 열려 있지만 실제로는 잠겨 있는 이중성이 재미를 주면서도 버킨백의 상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테니스라는 스포츠가 태생적으로 왕과 귀족, 성직자 등이 즐기던 고급 스포츠이기도 하는 등 상류층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이렇게 테니스라는 스포츠의 이미지만으로 고급스럽고 프랑스적인 감성이 묻어날 수 있을까. 에르메스의 컬렉션은 분명 테니스 복을 콘셉으로 브랜드를 진행하고 있는 라코스테의 컬렉션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준다. 라코스테의 옷들이 심플함과 젊음의 상쾌 발랄함, 깨끗함 등을 주장한다면 에르메스는 프랑스 특유의 여유로움, 우아함, 고급스러움을 선사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우선 소재의 사용에서 오는 이미지의 차이가 있다. 에르메스는 원래 마구(馬具)를 만들던 상점에서 출발했으며 가죽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발전해 왔다. 따라서 가방뿐 아니라 옷에서도 가죽을 많이 쓴다. 가죽 소재는 그 특유의 광택과 질감, 한정성 등 고급 소재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가죽 의상은 또한 바이크 라이더나 락 가수 같은 특정 아이템에 한정된 디자인이 많다. 최근 유행하는 라이더 재킷이 그렇고 헤비메탈 그룹의 가죽 바지가 대표적이다. 사진처럼 원피스 전체가 가죽으로 디자인 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가죽으로 만들어진 테니스용 원피스라서 라코스테의 피켓 소재 셔츠와 달리 더 고급스럽고 여유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라이더 재킷이나 가죽 바지는 왜 그런 느낌이 안 날까.
위의 원피스들의 색을 유심히 보자. 회색같기도 하고 연한 보라색 같기도 한 색, 서양 모델의 피부색과 거의 같은 색, 또 서양 모델의 금발과 같은 색이다. 세 가지 색 모두 원색이 무엇인지 좀 헷갈리기 쉽다. 우선 처음의 원피스는 푸른색이 좀 더 강하게 감도는 탁한 연보라색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의상은 보통 살색이라 불리는데 주황에 흰색과 분홍색, 노랑색 등을 미묘하게 조절하면서 조색해야 나오는 색이다. 간단하게 황토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의상의 색은 노란색을 베이스로 고동색과 흰색을 가미하면서 만든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색 모두 흰색을 사용하여 명도를 높였고 원색에 다른 색들을 첨가하여 채도를 떨어뜨린다.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색은 고유한 원색의 기운이 은근하게 감돌면서도 정확하게 그 태생을 모른다는 미묘함이 느껴진다. 정열적으로 들이대는 스칼렛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 매력을 발산하는 멜라니같은 색들이다. 보통 고급 브랜드들의 색 사용 전략이 그렇다. 원색으로 한 번에 눈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깊이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색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색의 사용법으로 그 매력을 점점 더해가는 에르메스. 그런데 지금 이 에르메스를 책임지고 있는 디자이너가 바로 장 폴 고띠에이다. 앙팡 테이블이라 불리던 바로 그 장 폴 고띠에.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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