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갈리아노의 디자인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아 보자. 지브롤터 출신이라는 문화인류학적 배경, 크리스찬 디오르라는 디자인적 D.N.A.는 존 갈라아노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존 갈리아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존 갈리아노가 존 갈리아노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만의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화려한 볼거리
전 세계에 매장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패션 명가들이 매 시즌 패션쇼를 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끊임없는 창조적 자극을 주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왜 존 갈리아노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패션쇼는 언제나 볼거리들로 질펀하다.
수십년 동안 존 갈리아노는 매 시즌 사람들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 패션쇼를 선보여 왔다. 아름다운 색깔, 뛰어난 형태, 독특한 구조 등 독특한 창의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존 갈리아노의 쇼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술이고, 뉴스거리였다. 게다가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이 마지막 무대를 수줍은 모습으로 채우는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퍼포먼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야 항상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 아래에서 광대(?)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지만, 그가 맡은 일이란 패션의 최고 앞자리에 서서 보이지 않는 미래에 빛을 던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고독한 일이다. 조금만 빛이 바래도 시끄러운 불만의 목소리와 함께 뒷 열로 밀려난다.
캄캄한 산길을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지해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일을 몇 십 여 년간 해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괴기스럽기도 한 그의 과장된 모습 안에 실지로 들어있는 모습이 어떠할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존 갈리아노를 단지 감각적이기만 한 디자이너로 만만하게(?) 생각하고 접근한다는 것은 실례일 수 있다. 존 갈리아노 디자인의 가장 큰 묘미는 사실 과장된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아래에 숨겨져 있는 깊은 내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그의 디자인 속에 항상 녹아들어있는 고전적 아름다움이다.
고전 속에 피어나는 디자인 센스
존 갈리아노의 패션은 항상 과도한 외형이 먼저 눈에 띄지만 그의 패션의 혈관 안쪽에는 고전주의적 패션의 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3의 패션 디자인을 보면 존 갈리아노가 아무리 실험적인 패션을 디자인한다고 해도 두 발은 고전적인 전통 패션이 두고 있다는 사실을 곧 확인할 수 있다. 우아한 실루엣에 튀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장식들은 중세부터 내려오는 서양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부활시킨 듯하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존 갈리아노의 인상을 생각하면 그가 이런 얌전한(?) 디자인을 했다는 것이 사뭇 신기해 보이기도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얌전한 가운데에서도 역시 갈리아노스러운 장난을 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중간 중간 얇은 천을 통해 푸른색 우아한 천 사이로 살색들이 은은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배어나오고 있다. 옷만 보면 우아한 푸른색이지만 살색은 이런 옷 색깔과는 보색관계에 있다. 고난도 색채논리를 활용하는 갈리아노의 장난끼가 고급스러움을 유지하면서도 활력을 준다.
여기 또 다른 갈리아노의 우아한 장난이 있다. 이번에는 화려한 질감에 고전적인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옷이다. 번쩍이는 치마 사이로 검은색 스타킹 밴드가 가려져야 할 곳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항변하고 있다.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부분도 장식을 하려는 것인지, 시선을 끌려는 것인지 모호하다. 고전을 차용한 덕에 오히려 더 섹시해졌다.
그림5처럼 얌전하게 전통적인 우아함을 고스란히 표현한 경우도 있다. 이런 디자인을 볼 때 존 갈리아노도 참 착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 정색을 하면 그 어떤 디자이너도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기본에 충실하고, 그 누구보다도 우아하게 옷을 디자인할 수 있는 디자이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름 잡힌 어깨에서 멜빵처럼 치마를 잡고 있는 옷의 구조도 존 갈리아노스러운 인상을 가질 수 있긴 하지만 이 옷의 연한 핑크색은 프랑스의 귀족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색상이다.
장난을 치더라도 기본은 확실하게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존 갈리아노의 진정한 힘은 이러한 탄탄한 고전주의에 대한 실력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옷에서는 그것을 또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재킷과 원피스라는 다소 포멀한 옷이지만 색이나 모자의 복잡한 구성이 표현주의적인 인상을 가득 품고 있는 옷이다.치마에 들어간 점무늬나 끝자락의 장식적 표현, 얇고 투명한 천이 덮여있는 재킷들을 보면 고전주의적 옷 같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시도들은 이 옷을 고리타분한 고전주의의 갇혀있지 않도록 하고 있다.
사실은 이런 고전주의적 표현을 하면서도 고전주의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다. 고전주의라는 관성은 아무래도 시간을 앞서게 하기 보다는 뒤로 쳐지게 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갈리아노는 이렇게 고전주의를 초대해 놓고서는 다른 방향에서는 고전주의를 전복하는 시도들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존 갈리아노의 패션 세계는 고전적 권위를 가지면서도 현대적 실험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 살펴보더라도 존 갈리아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실험적이거나, 장난스럽게만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주의를 활용하여 자기 디자인에 권위나 신뢰라는 덕목을 아무도 모르게 추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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