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디자이너와 서울의 패션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현시대에 활동하는 디자이너 중에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디자이너 중 한명이다. 패션 피플들에게는 해체주의자, 아티스트, 패션의 개척자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대중에게는 도대체 이게 무슨 옷이냐, 베지타(드래곤 볼의 캐릭터)의 어깨라인 아니냐 라는 비웃음을 받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현재 2009년 가을,겨울 어깨가 강조된 실루엣의 재킷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그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2007년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어깨에 힘과 각이 잔뜩 들어간 실루엣의 컬렉션을 잊을 수 없다. 어깨에서 10센티미터는 족히 위로 솟고 네모진 어깨를 가진 옷들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란…
그리고 반년 뒤 2008년 여름 디스코 열풍으로 한국을 강타한 엄정화의 무대에서, 그리고 무한도전에서의 정형돈의 패러디까지 파리에서 활동하는 벨기에 디자이너가 동양의 작은 나라의 대중문화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패션 감각이 남다른 아이돌로 인정받는 빅뱅의 G-DRAGON도 마르지엘라의 옷을 심심찮게 입는 모습이 노출돼 10대 사이에서도 통용되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하지만 얼굴 없는 디자이너로도 유명한 마르지엘라는 ‘그녀’라고 오해될 만큼 언론에 극도로 노출을 꺼려한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옷을 완성해 가는 그의 팀원들을 강조하는 편으로 흰 가운은 그들 그룹의 상징이 되었다. 디자이너의 옷이 주인공이 되어야지 디자이너의 스타성에 디자인의 가치가 주객전도되는 현실을 온몸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서유럽의 작은 나라
그의 디자인 철학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베네룩스 3국을 결성할 만큼 소국이며 프랑스와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벨기에 출신인 마르지엘라.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앤트워프 왕립 학교 출신인데 앤트워프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독일의 함부르크에 이어 유럽의 3대 항구도시 중 하나이며 플란더스의 개로 잘 알려진 플랑드르 지역에 속해있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죽기 전 꼭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이 성모대성당에 걸려 있는 도시이며 반 다이크, 얀 브뤼겔 등 바로크 미술의 대가들이 활동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다이아몬드, 패션산업, 무역, 금융업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풍요와 루벤스와 같은 플랑드르 미술의 대가가 활동한 곳이라는 문화적 전통이 강하여 앤트워프 시민들은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플랑드르 지방 특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정도의 작은 나라에서, 그것도 한 학교에서 현재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는 디자이너 중 약 20퍼센트가 이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종종 앤트워프 식스로 소개되는 마르지엘라는 사실 이 그룹에 속했던 것은 아니다.
앤트워프 식스(Antwerp Six)는 1980~81년 앤트워프 왕립 학교를 졸업한 6명의 디자이너로 앤 드묄미스터, 드리스 반 노튼이 속한 그룹이었다. 1980년대 일본 디자이너들은 서양복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전위적인 의상들을 들고 파리로 진출했고 이는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학교를 졸업한 젊은 패션 학도들은 1984년 일본 오사카 컬렉션 참가, 86년에 런던 컬렉션을 거쳐 89년 마침내 파리 컬렉션에 진출하며 파리 컬렉션이나 일본 패션과는 또 다른 새로운 벨기에 패션을 패션계에 알리는데 공헌했다.
마르지엘라도 1980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파리로 이주하여 황금 물레상을 받고 장 폴 고티에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벨기에는 국민의 대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고 하니 대학 졸업 후 26살의 젊은 나이에 옆나라로 일하러 간다는 환경이-특히 그 옆 나라가 프랑스라면-참으로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어찌했든 이 재능 넘치던 젊은이는 1988년, 31살의 나이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고 파리 컬렉션에 섰다. 1990년 안감을 겉으로 내놓고 시접과 봉제선을 미완성한 해체주의 패션을 선보인 컬렉션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후로 90년대에는 남성용 3XL 싸이즈의 옷으로 여성용 드레스를 만들거나 군용양말을 해체하여 스웨터를 재구성하기도 하고, 인형 옷을 확대하여 사람 의상으로 만들기도 하며, 재활용 의상들을 재구성하는 등 실험적인 패션쇼를 계속해 왔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옷과,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하여 2008년에 자신의 브랜드를 만든 20주년으로 회고 기념쇼와 전시를 했다. 그가 항상 과격하고 실험적인 모습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명품 중의 명품 에르메스의 수석디자이너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실험정신이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단단한 패션의 기초 위에서 진지한 가능성들을 모색하기 위한 합당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깨의 재발견
어쨌거나 최근 우리에게 가장 크게 각인 된 것은 오버 사이즈의 어깨이다. 처음에 선보였던 크고 각진 과장된 어깨는 점차 비대칭의 형태로 이어지거나, 축소되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디자이너 스스로도 새로운 조형을 만들기 위한 실험들을 계속했다. 한편 그의 어깨에 대한 탐구는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발렌시아가는 각진 어깨도, 기존의 퍼프 소매도 아닌 새로운 입체적인 둥근 어깨에 대한 실험을 완료해 가는 듯 하고,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의 발맹에서 비로소 현실과 타협된 새롭고 아름다운 재킷의 어깨실루엣으로 귀결 됐다. ‘록 시크’라는 표현으로 이젠 서울의 길거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타일이 됐지만 그 원천은 마르지엘라의 실험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80년대의 파워수트가 돌아왔다는 식으로 새로운 트렌드의 등장이 결국 복고주의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엄연히 2000년대의 어깨와 1980년대의 어깨는 다르다.
1980년대의 파워수트가 여권신장이나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로 남성의 실루엣에서 영향을 받은 트렌드였다면 2000년대 마르지엘라로부터 시작된 어깨의 변화는 인체 자체의 탐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마르틴 마르지엘라는 쇼킹한 패션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실험적인 패션들은 단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고, 실지 패션계를 이끌어가는 등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의 실험들은 현실 패션의 전위부대의 역할, 진정한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하면서 패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먼저 밝힌다. 덕분에 그의 뒤를 따르는 디자이너들은 그가 비추는 길을 따라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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