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는 것이 빼어난 교양 수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패션을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패션은 유명 연예인들이나 이름난 스타일리스트들의 손으로부터 일반인들의 생활 안쪽으로 스며들게 될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옷
옷은 그림이나 영화와는 다르다. 그림이나 영화는 잘 몰라도 그만이지만 옷은 누구나 입고 다니기 때문에 내 몰라라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옷을 잘 입는 것은 음식을 잘 해먹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음식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고 건강에 좋은 것을 먹는 것처럼 옷을 잘 차려 입는 일도 이와 똑같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옷을 잘 입어야 하고, 또한 잘 입을 수 있다. 옷은 건물과 음식과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중요하고 일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정규 교과과정을 마친 사람들도 넥타이 색깔 하나 제대로 맞출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음식은 레시피라도 있지만 옷 잘 입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옷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옷에 대한 정보들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을 잘 입기 힘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옷으로서의 옷과 환상으로서의 옷
옷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대일로에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옷에 대한 드라마가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웬만한 사람들도 ‘시크’나 ‘엣지’라는 말을 알고, 쓰고 있으며, 명품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 이름을 꿰고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관심과 지식들이 생활밀착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관심은 나의 취향에 맞는 옷을 어떻게 고를지, 내 몸에 맞는 옷은 어떤 것인지, 혹은 결혼식 때 어떤 옷을 입고 갈지, 친구들과 만남에 어떤 옷을 입고 갈지의 문제가 아니라 남 보다 좋아 보이는 것, 옷을 통해 차별적 우위에 서는 것을 근본에 깔고 있다.
목적이 이렇다 보니 옷에 대한 이해와 눈빛은 대개 계급주의를 깔게 되고, 옷을 입는 모든 기준은 내 몸 안이 아니라 내 몸 바깥에 두게 된다. 유명 연예인들이 앞을 다투어 패션 책들을 내고, 그것이 시장에 먹히는 사실은 그것을 잘 입증하고 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옷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는, 남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불경기에도 명품이 높은 매출을 올리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유명 패션모델이 각광을 받고, 초현실적으로 생긴 패션 디자이너들이 과장된 행동양식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것들은 사람들이 옷이 아니라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이처럼 출발부터가 패션은 생활이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결과가 실지로 옷을 잘 입는 데에는 크게 일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환상으로서의 패션에는 주체인 ‘내’가 빠져있고, 그 자리를 화려함이라든지, 사치스러움, 섹시함과 같은 추상적 목표가 대치하다보니 내 몸에 맞거나, 상황에 적합한 옷을 갖추어 입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틈새를 연예인들의 취향이나, 값비싼 명품 등이 대신하면서 스스로 옷을 잘 입는 길은 더욱 멀어지고, 그 만큼의 공백은 다시 세상을 떠도는 값싼 스타일이 채우게 된다. 그것도 호사라면, 이전에는 그래도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나 그런 호사(?)를 누렸지만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이런 흐름은 더욱 대중화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 옷을 잘 입는 방법이나 그것에 관한 원리는 점점 생활과 멀어지게 되고, 아울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흔치않게 되었다. 덕분에 옷을 잘 입는 능력은 축복 받은 감각을 타고난 몇 몇 전문가들의 소유로 전락하고, 그런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그들이 지시하는 데로 값비싼 옷을 사서 남들에게 계급적 우위만을 확보하는 데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옷을 잘 입는 방법은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감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런 감각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이나 명품이라는 틀에 안주할 수 밖에 없어졌다.
패션 미학의 의의
미학이란 것이 요즘은 인문학에 헐벗은 분야를 치장하는 두루뭉실한 용어로 많이 차출된다. 특히 패션과 같이 아름다움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실지로 만드는 행위가 아닌 모든 것을 뭉뚱그려 미학이라는 포승으로 묶기도 한다. 하지만 미학이란 정확하게 아름다움의 논리에 관한 것이고, 이 말은 아름다움이란 논리에 의거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션 미학이란 말로 시리즈를 엮게 된 것은 인문학적 사치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미지만 그럴 듯한 패션 전문가들에게 포획되어있는 옷에 대한 논리를 대중들에게, 생활의 중심으로 돌려 놓으려는 노림수가 있었다.
패션에서 미학이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은 패션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데에 논리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된다면 패션은 가장 일상에 가까운 교양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그러한 논리에 따라 자기 옷을 어렵지 않게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패션이나 미술과 같이 눈이란 감각기관과 관련된 분야의 미학은 눈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말하자면 눈의 작용원리에 입각한다.
좋은 옷이나 좋은 옷차림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보색대비가 강렬한 옷은 다른 옷들 보다 눈에 띄고, 아름다워 보일 확률이 높아진다. 옷만 그런 게 아니라 그림도 그렇다. 보색대비로 이루어진 그림은 그렇지 않은 그림보다도 눈에 잘 띈다.
패션에서 무슨 전문용어인 것처럼 말하는 ‘믹스 앤 매치(Mix & Mach)도 그렇다. 굳이 영어로 쓸 만큼 특이한 원리나 기술이 아니다. 정확하게 미술이론에서 말하는 대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질감이나 모양새가 서로 다른 것들을 바로 붙여 놓으면 다른 것 보다 눈에 튄다. 입시 미술학원에서도 배울 정도로 기초 중에 기초적인 원리이다. 이것을 패션에서는 요상한 영어로 둔갑시켜 무슨 대단한 기술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패션에서 미학이 자리 잡지 않음에 따라 생기는 우스꽝스런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대비‘가 아니라 ’믹스 앤 매치‘라고 듣는 일반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대비의 원리는 어렵지도 않고, 일반인들이 알아 두어도 유익한 원리이다. 이 원리 하나만 알고 있어도 옷을 입을 때 많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믹스 앤 매치라면 일반인들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할 만하다.
그간 패션계는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을 사전 차단했고, 그것을 통해 허위의식을 안개처럼 피워 올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옷의 상품가치에 거품을 일으켰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옷을 잘 입는 일을 혼자 할 수 없는 일,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의 조언이나 유행이라는 대량 생산품의 힘을 업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로 생각했다. 모두가 패션 미학이 자리 잡지 못한 데서 나타나는 문제였다.
옷은 결국 눈의 문제이고, 몸과의 관계에서 수 많은 변주가 일어난다. 여기에는 유명 모델이나 특이하게 생긴 디자이너, 값비싼 명품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옷을 입는 사람과 옷만이 있을 뿐이다. 패션 미학을 주제로 한 연재는 바로 이런 목적을 가지고 진행됐으나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동안 연재에 관심을 기울여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디자이너들의 작품세계를 다루는 새로운 연재를 통해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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