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임진왜란과 몽진
선조 25년(1592년)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명나라를 친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일본의 기습공격에 전쟁 준비에 소홀했던 조선은 연전연패했고, 결국 한양마저 위태롭게 되자 선조는 서둘러 몽진을 하게 된다. 적을 피해 달아나는 길이었기 때문에 백성들과 지방 관리들의 외면을 받아야 했고, 급기야 일행 중에는 굶어 죽거나 몰래 도망가는 신하들이 생겨났다. 험난한 고행의 연속인 몽진이었지만, 47세의 허준은 어의 양예수와 함께 왕을 보필하며 끝까지 몽진 행렬을 따랐다. 그러나 일부 고위직 관료들에 비해 의관들에 대한 대접은 형편없었던 모양이다.
선조의 옆을 지키던 유성룡은 몽진 도중에 70대의 양예수에게 “어의의 각기병(脚氣病; 무릎관절염)에는 난리탕이 제격이구려”라고 했다. 이 말은 20-30대 새파랗게 젊은 문관은 말을 타고 일행을 따르는데, 당시 관절염을 앓고 있던 백발의 노인은 걸어가는 것을 보고 유성룡이 비꼰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젊은 관리 한 명이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양예수에게 주어서 타게 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당시 양반들이 기술직 관리들에게 얼마만큼 차별대우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물론 허준과 양예수는 나중에 몽진에 따른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록을 받게 된다.
선조가 의주에 도착했을 때 명나라의 응원군이 파병되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선 의병들과 승병의 눈부신 활약과 이순신 장군이 해상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왜병들은 자신감을 잃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격문을 내려 왜군 격퇴에 박차를 가하지만, 늙은 선조 혼자서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봉하고 일부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다.
광해군은 부왕을 대신하여 결제를 하고 지시를 내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너무 과로하여 질병에 걸리고 만다. 이에 허준은 탁월한 의술로 단 며칠만에 광해군을 완쾌시켰고, 이 일을 전해들은 선조는 허준에게 가자(加資) 품계를 다시 내린다.
몇몇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허준의 공로를 높이 산 양반 관리들의 묵인 하에 허준은 품계를 받을 수 있었다.(선조 29년 3월 3일) 한양으로 되돌아온 선조는 허준을 불러 새로운 의학서 편찬을 지시한다. 왕이 몽진 도중에 수많은 백성들의 질병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쟁 때문에 무너진 민심을 되돌리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이 일의 명목상 책임자는 양예수였지만, 실질적인 편찬 업무는 허준이 도맡아야 했다. 허준은 당시 유학과 의학에 정통하던 정작과 내의원 의관이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편찬국을 설립하여 의학서 편찬에 몰두했다.
그러나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발발한 정유재란으로 인해 편찬국 인원은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 그리고 어의 양예수가 노환으로 쓰러져 허준은 어의의 역할마저 떠 안게 된다.
결국 새로운 의학서의 편찬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백성의 질병을 쉽고 빠르게, 안전하면서 값싸게 치료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던 의학서는 나중에 허준 혼자서 완성시켜 『동의보감』으로 탄생하게 된다. 물론 이 일로부터 15년 후의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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