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의 양예수의 죽음과 정치적 위기
두 차례의 왜란이 끝난 선조 33년(1601년) 인조 때부터 어의를 맡았던 양예수가 숙환으로 죽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공식적인 부의를 내리고, 공석이 된 어의 자리에 허준을 임명했다. 그리고 선조는 새로운 의학서의 편찬을 잠시 보류하고 허준에게 출산과 관련된 『태산집(胎産集)』, 각종 구급법을 집대성한 『구급방(救急方)』, 천연두의 치료법을 기록한 『두진집(痘疹集)』을 보완해서 다시 만들도록 지시한다. 왜냐하면 왜란을 겪으면서 내용의 일부가 유실되었고, 만들어진지 오래되어 새롭게 보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허준은 3종류의 책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책의 저술이 끝나자 선조는 또 다시 허준에게 명을 내려 일반 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된 언문서를 출간하도록 했다. 허준은 한자로 되어있던 이 책의 내용을 한글로 쉽게 풀어서 다시 3종류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이러한 작업들은 어의 역할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허준은 매우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력적인 집필 작업으로 결국 5년간 6종의 책을 완성하게 된다. 물론 이 책의 내용들은 나중에 완성될 『동의보감』에 포함되므로 허준 혼자서 새로운 의학서의 집필을 떠맡은 셈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던 선조 37년(1604년)에 왕은 왜란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록을 하사했다. 허준은 의주까지 몽진한 왕을 보필하면서 고생한 공로를 인정받아 의관 이공기와 이연록 등과 더불어 호성공신 3등급에 봉해졌다. 그리고 2년 후 허준은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으면서 양평군(楊平君)으로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인 허겸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곧 바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바로 천한 신분에서 정식 양반이 되는 면천의 과정이었다.
조선시대 어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허준이었지만 업무 때문에 수십년간 부모의 묘소에 성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고 고향인 공암과 부모의 묘소가 있던 하포리를 방문한다. 그러나 성묘를 바치고 돌아온 허준에게 맨 처음 전해진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를 비방하는 상소문이 접수되었기 때문이다.
“허준은 숭록의 자리에 있는 고위 관료로서 왕의 주치의를 맡고 있다. 그러나 사적인 일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문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상소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결국 왕이 허락한 휴가였음이 밝혀져서 없었던 일로 되었지만, 허준의 상심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노쇠한 선조의 건강 또한 매우 좋지 않았다.
허준이 양평군으로 되었던 1604년 선조는 허준을 비롯한 의관들과 조선 최고의 침술을 지닌 허임에게 치료를 받았다.
특히 6번에 걸친 침시술로도 선조의 잔병치레는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에는 어의 허준를 비롯한 의관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통해 전국에서 빗발치기 시작했다. 상소문의 주된 내용은 “의관들이 정성껏 치료하지 않고, 어의가 삿된 일에 정신이 팔려 처방에 소홀하기 때문에 왕의 질병이 치료되지 않고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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