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봤다. 영화의 메인 카피는 ‘그 시간에, 내 사랑은 멈췄다.’ 사랑하기도 미안했던 1980년대 말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였다. 혹자는 방북 사건을 겪었던 작가 황석영의 원작 소설이나 <바람난 가족> <그때 그사람들> 같은 영화를 만든 임상수 감독에 대한 기대가 컸을지도 모르고, 혹자는 순애보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시대에 사로잡히거나 울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주지 않는다. 영화 속 두 사람은 행복했고, 그래서 불안했고, 신나게 사랑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미안한 마음이 남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주인공 윤희는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이 무르익고, 사랑이 떠나고, 혼자 남아서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는 시간까지 사랑하고, 지키고 싶고, 무섭고 불안해도 당당하게 살고 싶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편집자주>
오현우(지진희 분)와 한윤희(염정아 분)는 운동권 도발이와 숨겨주는 시골 학교 교사로 인연을 맺는다. 윤희의 죽음을 접한 현우의 기억을 따라가는 영화에서 그가 기억하는 윤희는 항상 당차다.
두 사람의 첫 만남, 6개월의 도망 생활로 지친 현우가 윤희에게 “자신을 김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자 그녀는 대뜸 “찾아오기로 한 도발이 이름도 모를 줄 알았어요, 오현우 씨”라고 답한다. 긴 웨이브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흰 스커트, 흰 셔츠, 남색 트렌치 코트에 분홍색 꽃무늬 스카프 차림의 청순한 윤희에게 현우는 호감을 느꼈다.
갈뫼, 당차지만 여성스럽게
‘오래된 정원’은 두 사람의 추억을 담고 있다. 또 이것은 윤희가 죽기 전에 머물렀고, 현우가 출소한 후 기억을 더듬었던 장소인 갈뫼를 나타낸다. 갈뫼에서 살기로 결정하고 집을 정리하던 날, 현우가 조심스럽게 꺼낸 “사실은 저 사회주의자입니다”라는 고백은 마치 사랑 고백 같다. 그 말을 듣는 윤희는 담담하게 “예”라고 대답할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분명 두 사람의 행복은 시작됐다.
현우와 함께 하던 윤희의 옷은 스커트, 셔츠, 트렌치 코트 차림과 롱 스커트, 면 티셔츠, 니트 차림으로 나눌 수 있다. 미술 선생인 그녀의 롱 카디건, 크로쉐 니트는 내추럴한 스타일의 전형이다. 갈뫼에서의 윤희는 미묘한 색상 변화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해서 행복하고, 떠나는 연인을 잡고 싶어서 불안하고 복잡한 심리를 보여준다. 영화의 짧은 부분을 차지하는 갈뫼 장면이 이야기 전반에서 중요하게 남는 것은 바로 이렇듯 변하는 마음의 표현 때문일 것이다.
현우와 사랑을 하면서 윤희는 당찬 성격 속에 감춰뒀던 여성미를 드러낸다. 광주 항쟁 1년 째 되는 날 현우와 소풍을 간 윤희는 흰 스커트, 흰 티셔츠에 연한 분홍 티셔츠를 레이어드해 입고 분홍 볼레로 카디건을 걸쳤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연인에게 도움이 되지 못 해서 슬픈 그녀는 베이지 컬러를 활용한다. 연한 베이지 스커트, 베이지 트렌치 코트, 검정 치마와 블라우스는 현우 대신 광주 항쟁에 함께 했던 동료들에게 사과하는 그녀의 마음 같다.
현우가 갈뫼를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그녀는 회색 옷을 즐긴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나만 생각해 달라”며 “나 다운게 뭐냐”며 “봄이 되면 다시 생각하라”며 매달리는 윤희는 빨강 체크 스커트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한편 벌룬 소매 흰 티셔츠에 회색 롱 니트 카디건과 먹색에 가까운 회색 머플러로 자신의 감정을 죽인다.
흰 스커트, 흰 셔츠, 베이지 롱 카디건에 고무신을 신고 노란 우산을 든 채, 떠나는 현우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윤희의 모습에서는 잡을 수 없었던 행복에 대한 체념과 후회가 묻어난다.
수트 속으로 감춘, 멈춰진 시간
“자신만 행복하면 안 되는 시대였기에 저지른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고 현우가 지난날을 돌이키는 동안 윤희는 살아야 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가진 윤희에게 삶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화실을 갖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미혼모라기 보다는 당찬 지식인이다. 파워 수트로 대변되는 1980년대 여피 스타일을 현대의 미니멀리즘과 접목시킨 윤희의 옷 차림은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자 당당해야만 하는 그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윤희의 차림은 변했다. 웨이브 머리에
신수연 기자
ssy@fi.co.kr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