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와 호수와 옛길과 포도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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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오후 4:12:33

버거킹에서 치킨버거(메뉴 이름은 치킨 로얄)를 먹을 때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가끔씩 필리핀 아줌마들이 말을 걸어온다. 주로 파트타임으로 궂은 일을 하는 그네들에게는 동양 사람을 만나는 일이 반가운 모양이다. 언제나 가장 먼저 나오는 물음은 “쟈포네제? 치네제?(giapponese? cinense? 일본 사람이냐? 중국 사람이냐?)” 이탈리아에서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한국을 모르는 사람은 또 아무도 없다. 다만 꼭 “코레아 델 노르드? 델 수드?(Corea del nord? del sud? 북한? 남한?)”를 물어온다.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도 한국인임을 매일같이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외국 생활인 모양이다. 그런 한편 한국인, 아니 동양인은 혼자인 채 서양 사람들이 득실대는 공간에 있는 것도 점점 익숙해진다. 감각도 세계화되고 있는 까닭이겠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파티를 하면 어떻게 모여서 놀까? 하는 것이 궁금해서 초대를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은 일요일 저녁 7시 30분. 밀라노에서는 보통 저녁 식사 시간이 8시 정도다. 7시 전에는 식당 문도 열지 않는다. 물론 두오모 근처 관광객이 많은 곳은 종일 영업을 하지만, 대부분 점심 시간이 지나면 문을 닫았다가 저녁 7시쯤에 다시 영업을 시작한다. 저녁 약속이라도 있으면 밥만 먹고 들어와도 11시가 되어야 한다. 일요일 저녁 7시 30분은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손님을 초대하기에 그다지 이상한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장소는 밀라노 근교에 있는 제사테(Gesate)라는 곳이다. 지하철 노선표상에 있는 마지막 정거장이기는 한데, 시내 요금으로는 갈 수 없는 외곽 지대다. 한 구역에 1분 남짓 걸리던 지하철이 교외로 나가서는 5분 이상씩 가야 다음 역에 정차한다. ‘신도시’라고 할까? 밀라노 시내에 있는 집들은 다 낡아빠졌는데 근교에 있는 집들은 새로 지은 근사한 집들이다. 이 날의 파티 명목은 집들이. 한 이탈리아 남자와 핀란드 여자가 런던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고 이탈리아에 와서 집을 장만하고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을 초대하는 자리다. 핀란드 여자는 이탈리아에 친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참석한 친구들은 거의가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집으로 들어가니 거실 식탁 위에 음식 접시들이 놓여 있다. 리조토(risotto) 한 가지, 감자를 썰어 만든 샐러드 한 가지를 빼면, 치즈 썰어 놓은 것, 햄 썰어 놓은 것, 케이크 썰어 놓은 것이 전부인 상차림이다. 여기에 맥주와 와인과 쥬스와 물. 종이 접시 위에 음식을 담아 플라스틱 포크로 먹으며 서서 혹은 소파에 앉아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해서 만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엘레나인데 “10월 8일 일요일에 코모 호수 주변을 걷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같이 갈래?” 하길래 ‘코모 호수’라는 말에 혹해서 “가지 뭐.” 하고 대답한다. ‘코모’는 잘 알다시피 실크 전문 원단 전시회인 ‘이데아 코모’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호수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약속한 일요일 아침, 밀라노 북역 매표소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 날 만났던 친구들과 가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꼬마 아이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알고 보니 ‘트레킹 이탈리아(trekking italia)’라는 단체에서 가는 하루 트레킹이다. 신청을 하고 모인 총 22명 중 아는 사람은 세 사람, 그리고 엘레나가 바로 이 날 트레킹의 가이드였다. 현재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트레킹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북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한 시간 정도 가서 코모 라고(Como Lago, 코모 호수) 역에 닿는다. 기차 안에서 그 날 참가비를 걷는데, 다른 사람들이 21.50 유로씩을 내는 동안 필자는 36.50 유로를 낸다. 처음에 초과분 15유로는 비회원으로 참가하기 때문에 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원가입 양식을 작성하게 하고 회원증을 주는 걸 보면 단체 가입비인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는 산악회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던 사람이 트레킹 이탈리아의 회원이 되고 말았다. 트레킹이라는 말을 야후! 백과사전에서 찾아본다. <산의 정상을 목표로 하는 등산이 아니라 산허리에서 풍광을 감상한다든지 산의 문화를 찾아보는 여행, 또는 낮은 산을 중심으로 한 가벼운 등산. 본래 의미는 히말라야와 같은 높은 산을 바라보기 위해 높이 3000∼5000m 지점을 걷는 도보여행이었다. 트레킹보다 높이가 낮은 산야를 걸어다니는 것은 하이킹이라 함.> 산 허리에서 풍광을 감상하고 산의 문화를 찾아보는 여행, 정확히 이 날의 트레킹과 일치하는 정의이다. 먼저 코모에서 배를 타고 토르노(Torno)까지 간다.

정인희 금오공대 교수
ihnhee@kumo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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