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여년 전, 무척이나 가지고 싶었던 구두가 있었다. 금속과 리본 장식이 달리고 굽이 낮은 구두로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구두를 신은 것이 아닌가 싶어 보일 정도였다. 몇 번이나 매장에 찾아가 신어보고 고민하다 결국 구두를 사 신고 돌아오는 날에는 내가 무척이나 우아해진 것 같은 생각에 서 있는 자세까지 조심스러워졌었다.
그렇게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페라가모의 ‘바라’ 라인은 그 당시 대 유행이었던 ‘청담동 며느리룩’에 방점을 찍는 구두였다. 지나치게 여성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스포티하지도 않은 스타일로 단아하면서도 편안한 이미지의 구두라서 어떤 옷에 맞춰도 잘 어울렸다.
우아하지만 활동적인 여성을 위한 구두. 이것은 페라가모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이자 그의 페르소나인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와 같은 셈이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페라가모의 납작한 플랫 슈즈를 신고 나와 커다란 유행을 만들어낸 이후로 오드리 헵번은 그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나왔다. 이런 스토리를 알고 있는 많은 여성들은 지금도 그녀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페라가모를 바라본다. 페라가모를 신을 때 만큼은 누구나 오드리 헵번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며 그녀를 통해 브랜드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다. 이런 스토리는 피렌체의 페라가모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페라가모 박물관에는 그 동안 생산된 수많은 구두의 디자인과 함께 이 곳에서 구두를 맞춰 신었던 여배우들의 발 모형이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페라가모의 역사와 그것을 실제로 사용했던 동경의 대상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배우에 대한 동경과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좋은 이미지가 브랜드에 바로 이어져 소비자들은 페라가모를 일반적인 구두가 아닌, 좀 더 특별한 무엇이 있는 브랜드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가치와 감동
이렇듯 브랜드에서는 소비자들이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흔히 다른 브랜드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좋은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 혹은 브랜드 파워를 형성하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브랜드 스토리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브랜드 스토리는 그렇게 마케팅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브랜드 스토리에는 한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르메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은 에르메스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 들이는 공정과 장인정신이다. 세간에 유행하는 말처럼 ‘이탈리아의 장인이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꿰맨’ 에르메스의 가죽제품들은 그 자체로 최고의 품질을 가진 제품만을 제공하겠다는 브랜드의 신념과 맞닿아 있다.
보증된 품질과 한정된 수량,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는 말을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이미 ‘장인이 생산하는 물건’이라는 스토리를 통해 소비자들은 에르메스의 가치를 읽어낼 수 있다. 가죽제품을 단순하게 고가의 제품으로만 취급한다면 거론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브랜드를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스스로 브랜드가 전하는 이야기를 체계화 하면서 브랜드 가치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상품을 구매할 때 여러 조건을 따져보는 사람들도 막상 명품 브랜드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비싼 가격의 루이비통 가방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가격이나 품질만이 소비자들의 고려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튼튼하고 오래 써도 쉽게 싫증나지 않는다는 이유도 루이비통 가방을 구매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지만 그런 이유라면 가격도 저렴하고 튼튼한 가방이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가죽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캔버스 천에 PVC 코팅을 한 이 가방을 굳이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피디 30을 3초에 한 개씩 팔린다는 의미의 ‘3초 백’이라고 불리게 만든 원동력은 과연 어떤 것일까?
루이비통의 광고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루이비통의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매우 귀족적인 기품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소비자들을 자극하여 이 가방만 들면 자신이 상류층의 여성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한다. 그 점을 잘 아는 루이비통은 리조트 여행이나 요트대회, 클래식 자동차 전시 같은 상류층의 문화를 후원함으로써 브랜드의 이미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의 환상과 꿈을 스토리 콘텐츠로 활용하는 지극히 단순한 방법이지만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가치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소비자들의 감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산 것은 가방 하나지만 프랑스 귀족의 기품과 모던한 센스가 함께 딸려오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길을 지나가다 들른 편의점에서 산 생수병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치다. 이렇게 브랜드의 철학을 이야기 구조로 재해석 하여 소비자들에게 재미와 정신적인 감동을 주는 작업이 이미 명품 브랜드들에서 선행되어 오고 있다.
브랜드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사실 한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는 철학적 의미 없이는 단순한 단어에 불과하다. 따라서 브랜드 내부에서 일어나는 행위들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기업 외부에 있는 소비자들에게 이를 인지시키기 위해서는 브랜드에 철학적 가치가 필요하다. 인간의 보편성을 반영하는 철학적 가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매의 기쁨만이 아니라 가치를 얻었다는 깊은 감동과 브랜드에 대한 설득력까지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브랜드의 철학적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나 가치관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브랜드 철학은 생산자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시장에서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브랜드 스토리다.
좋은 스토리는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브랜드 가치를 풀어나간다. 대중은 스스로 스토리를 체계화 하면서 가치를 습득하게 된다. 이런 브랜딩의 장기적인 방향 설정 없이 스토리텔링을 마케팅 전략으로만 생각한다면 가치에 대한 부분을 생략하게 되어 일관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브랜딩과 스토리텔링은 공통된 ‘감동’과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스토리텔링에 성공한 브랜드들은 이 점을 잊지 않고 있다. 철학적 의미가 담긴 브랜드 가치를 스토리에 대입하여 설득력 있고 지속적인 감동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브랜드 스토리는 이제 하나의 문화적 이슈로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현상을 잘 봐야 한다. 스토리텔링을 단기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감동을 주는 가치로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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