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항상 현재, 지금의 삶에 의문을 갖는다. 어떻게 권력이 사용되고 남용되는가. 나는 국가와 정부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가 역사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들에 반응하며 작업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또는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정치인이 했을 법한 말이다. 하지만 패션 디자이너가 이렇게 말했다면?
보통 패션 디자이너는 타고난 탐미주의자여서 자신을 꾸미거나 타인을 꾸며주는 것을 좋아하거나,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거나, 옷이 너무 좋아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 패션 디자인에만 빠지기 쉽다.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면서 더 신선하고, 아름다워 보일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후세인 샬라얀은 여느 패션 디자이너와 차원이 다르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패션에 한정되어 있지 않는다. 영화도 제작하고 전시도 하는 그의 활동 영역은 패션 디자이너라기보다 전천후 예술가에 가깝다. 단지, 매 시즌 컬렉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과 세상에 대한 의문의 결과물을 패션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그를 패션 디자이너라고 규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여느 디자이너와는 다른 주제를 탐구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자라온 환경의 중요성
“나의 영감은 유전학, 이동(여기에는 민족적 이동과 운송 수단으로서의 이동), 역사, 사회적 편견, 정치, 과학적 허구, 그리고 나의 고유한 문화적 배경에서 온다.
후세인 샬라얀은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키프로스 섬의 수도 니코시아에서 태어났다. 키프로스 섬은 오늘날 터키인 소아시아 반도의 남쪽에 있다. 서아시아 또는 중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서아시아, 남부 유럽, 북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키프로스 섬은 오랫동안 그리스 본토의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 후반부터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 독립하였다.
그가 태어났던 1970년은 터키계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 간의 민족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복잡한 지역의 정치적, 인종적 분쟁으로 인한 민족의 이동 등은 바로 그가 영감을 받는다는 주제와 직결된다. 그가 8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다. 타국에서 그가 받았을 차별 또한 사회적 편견이라는 주제와도 연결이 된다.
그는 처음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미용사, 파일럿, 배우, 건축가의 다양한 관심을 거쳐 마지막으로 되고 싶었던 것이 패션 디자이너였다.
어찌되었든 1993년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디자인 & 아트 스쿨을 졸업하면서 그는 누구도 생각하지도, 시도하지도 않았던 졸업 작품으로 이목을 집중 받는다. 그것은 완성된 실크 드레스를 쇠와 함께 땅속에 묻었다 꺼낸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실크 드레스에 녹슨 쇠와 흙으로 물든 작품이 나온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패션계에서 흙과 녹슨 쇠로 범벅이 된 드레스가 사람들에게 회자 되었던 것은 패션에 접근하는 새로운 태도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졸업 작품은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꼼 데 갸르송 등 지금의 거장들이 무명이었을 시절 그들을 발굴한 런던의 고급 명문 매장(?) 브라운스에 걸리게 되었다.
현실적인 문제
후세인 샬라얀은 1995년 1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런던 패션 위크의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한화로 약 5000만 원 가량의 우승상금을 받았고 그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만들어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또 그해 그는 아방가르드 팝 스타인 비욕의 ‘Post'라는 앨범 재킷에 들어갈 옷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후세인 샬라얀에 대한 기사에 항상 등장하는 것으로 접으면 항공 기처럼 접히는 옷이었다. 당시 그는 비욕의 Post의 투어 공연 의상을 더 제작했고 그 인연으로 비욕은 그의 컬렉션에 모델로 섰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뉴욕의 니트웨어 레이블인 TSE의 디자인 컨설턴트로 지목되어 TSE와 콜래보레이션 작업을 했다. 2001년 이후로 TSE와 계약이 끊긴 것은 25만파운드, 한화로 약 4억원에 달하는 샬라얀의 레이블의 재정적자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대중적인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컬렉션을 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 궁금하다. 알고보면 그는 후원과 자금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국경을 초월한 다양한 회사들이 그의 재능이 현실적인 벽에 막히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하이 스트리트 패션 레이블인 막스 앤 스펜서의 디자인을 맡아 겨우 연명해 갈 수 있었고, 이탈리아의 의류 브랜드인 Gibo와 영국의 보석 브랜드인Asprey가 동시에 그를 패션 디렉터로 임명하였다.
한 마리 우아한 백조 같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물 밑으로 얼마나 갈퀴질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그의 실력은 결코 녹슬지 않았다. 1999년과 2000년 두 번에 걸쳐 영국의 디자이너로 뽑혔다. 2006년과 2007년에는 국제적인 상도 받았다
어쨌거나 그의 재정적인 문제는 계속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도 영국의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 모금을 위해 그의 작품을 런던의 고가 경매에 붙였다.
2008년 그는 또 한 번 전설이 된 컬렉션을 선보였다. 스와로브스키와 협업한 LED를 이용한 드레스를 선보인 것이다. 2008년부터 독일의 스포츠 브랜드인 푸마는 샬라얀 브랜드의 지분을 다수 사들였고 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하였다.
아직까지 그는 푸마로 좀 더 많은 대중들이 그의 세계를 향유할 수 있도록 디자인 하고 있으며 그의 컬렉션도 파리에서 매 시즌 선보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갭
왜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패션 기업들이 그가 묻히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일까. 그의 컬렉션을 보면 알 수 있다. 패션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환상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환상을 주는 방식이 독보적이다.
사진 ①은 항공기를 연상시키는 드레스, 자동으로 열리는 드레스, 그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드레스다.그의 옷에는 여느 패션 디자이너들은 시도조차 못하는 제품 디자인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우선 천이 아닌 딱딱하고 매끈한 표면 질감이 느껴지는 소재들의 사용으로 신선함이 느껴진다.
제품에서만 쓰일 것 같은 플라스틱 같은 소재가 너무나 적절히, 이질적으로 느껴짐 없이 옷으로 녹아드는 것이 그의 장기이다. 물론 소재도 특이하지만 그와 함께 구현되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사람들에게 더욱 환상을 선사한다. 항공기 드레스나 자동으로 움직이는 드레스가 그랬다.
소재와 기술뿐이 아니다.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각도로 패션을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그 유명한 커피테이블이 치마로 바뀌고 소파 커버가 원피스로 변하던 2000,2001 F/W컬렉션에서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이동과 관련 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때 자신의 가구들을 옷으로 입어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도 분명 먹고 사는데 끊임없이 고민하는 패션 디자이너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실제적으로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일지라도 그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분명히 가고 있다. 그렇게 그만의 시각으로 만든 옷은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것이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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