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
마르지엘라는 다른 패션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로 꼽힌다. 때로는 너무 시대를 앞서가 범인(凡人)의 눈으로 보기엔 이해가 안 되더라도 분명 다음 컬렉션에서 타 디자이너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라기보다 옷이라는 표현 도구를 사용하는 현대 미술작가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컬렉션을 보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자.
눈속임
그의 20주년 기념 패션쇼였던 2009년 봄 컬렉션은 시작부터 그가 지향하던 디자인의 가치가 장식성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킷도 토르소도 아닌 무엇인가를 평면(원피스)에 입체감이 느껴지는 그래픽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전체 컬렉션에 걸쳐 관객을 속이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처음 이 컬렉션을 접했을 땐 살짝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두 번째, 세 번째 옷을 보면 좀 더 직접적으로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두 번째 작품은 평범한 하얀 재킷이다. 바로 뒤이어 나오는 옷도 하얀 재킷이다. 얼핏 보기엔. 하지만 조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팔과 몸통이 붙어있고 라펠도, 단추도, 주머니도 없다.
게다가 목 언저리를 보면 뒷면은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마치 석고로 앞 작품의 큰 형태만 떠 놓은 듯하다.
직접 쇼를 본 사람이 아니라면 인터넷을 통한 화면으로만 접할 수 있을 텐데 3차원의 의상이 2차원에 표현될 때의 상황까지 고려한 느낌이다. 이미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된 살구색 바디수트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그 바디수트를 통해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면죄부를 얻었다. 위의 사진에서도 눈, 코, 입까지 가려진 모델은 말 그대로 단지 살아있는 마네킹에게 하얀 재킷만을 입힌 것처럼 보인다.
하의도 안 입은 듯하고 구두마저 살구색이다. 이로써 더욱 극단적 효과-하의는 아무 것도 안 입은 것 같은 착각으로 인한 충격과 다리가 길어보이는-를 누리면서도 사실은 피부와 같은 색의 무엇인가를 입었으므로 윤리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면죄부를 얻은 것이다. 마치 나체인 듯한 이 살구색 바디수트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사실 그는 재킷의 구조실험도 병행하고 있었다.
소매와 몸통 사이로 나온 팔을 보라. 또 한 가지 곱씹을 만한 것은 그는 같은 형태의 의상을 흑인 모델에게도 입혔다는 것이다.(그림 3-2) 이는 인종적인 문제라기보다 살구색 바디수트와 팔의 구조가 특이한 재킷이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흑인 모델을 기용한 것 같다.
나체같이 보이기 위한 표현을 위한 것이었다면 흑인에게는 흑인의 피부톤에 맞는 갈색의 바디수트를 입혔어야 하는데 백인의 피부색 같은 살구색을 사용했다는 것은 옷 자체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이 바디수트는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몇 년 전에는 한 시상식장에서 장미희씨가 입은 마르지엘라의 의상으로 대중에게 큰 각인이 되었다. 검정 바지 정장에 검정 재킷 안으로 검정 브래지어만 한 착각을 들게 만드는 옷이었다.
사실은 살구색 바디수트에 프린트 된 선글라스(?!)였다는데 가슴으로 시선이 쏠리는 통에 나중에서야 그 겉에 입은 재킷이 얼마나 공이 들어갔는지 알게 됐다고나 할까. 하지만 처음 그의 컬렉션을 접하게 되면 이런 충격적인 의상에 먼저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그 뒤로도 계속 그는 관객을 속이려는 실험을 계속해 갔다. 중간 중간에 간간히 나오는 충격적인 의상들은 처음 컬렉션을 볼 때는 엄청난 충격도로 머리를 강타했는데 몇 번 더 찬찬히 감상하다보니 디자이너가 관객을 속이기 위해 숨겨놓은 장치를 찾는데 더 재미가 붙게 된다. 이 사진도 세 번째 컬렉션을 봤을 때야 그의 속임수를 알아 챌 수 있었다.
그림자를 자세히 보라. 사실 컬렉션 전체를 보다보면 그의 속임수에 자연스럽게 홀릴 수밖에 없다. 충격적인 의상에 먼저 눈과 뇌가 반응했고 이렇듯 2차, 3차적으로 곱씹어봐야 할 부분은 그에 가려져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마르지엘라의 이런 실험은 현대 미술계의 문제와 상통하고 있다. 충격만 있지 그 안의 내용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 번 더 곱씹을 거리를 준다는 것 때문에 과연 그는 깊이감을 획득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판단은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다시 어깨에 주목
2010 봄 컬렉션에서 그는 또 한 번 패션계의 이슈거리가 되었다.
저명한 패션 언론사에서는 패션과 대학생의 졸업 패션쇼 같다는 악평까지 쏟아냈는데 이는 2009년 컬렉션과 같은 방식의 컬렉션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난해하고 충격적인 의상과 곱씹을만한 의상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 마르틴 마르지엘라의 가치를 놓치기 쉽다.
분명한 것은 그가 2010년 봄에도 어깨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인가 발전할 꺼리를 찾은 것이 분명하다.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