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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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원의 미학으로 본 패션 (36) ━ 옷과 색 ⑦

2009-07-03 오후 3:09:04




억울한 대접받는 회색

회색 분자. 자기한테 유리한 쪽을 찾아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사람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말이다. 이 말을 듣는 회색은 참 억울할 것 같다. 단지 색이 그럴 뿐인데 그렇게 부정적인 대접을 받다니…

사실 우리나라에서 회색은 오랫동안 좋은 대접을 받아 오지 못했다. 색에 대한 민족적 취향이 회색을 비껴나간 탓도 있겠지만, 이런 저런 색이 모두 합해진 지조 없는(?) 성격은 회색에다 비호감의 족쇄를 채워 놓았다. 게다가 두 말할 필요 없이 한 눈에 느껴지는 칙칙한 색감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회색을 좋게 보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색깔로서 회색은 결코 부정적으로 볼 수 없다.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은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다른 색을 북돋아주는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면, 회색은 오히려 윤리적이다. ‘회색 분자’라는 말은 정말 천부당만부당하다.

<그림 1>의 패션 디자인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 디자인에서 회색을 빼고 보면 그러한 사실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상의의 회색이 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나머지 색들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색들의 관계가 서로 애매하다. 밝기 차이가 많이 나서 눈에 확 뜨이는 것도 아니고, 색상 대비가 심해서 화려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치마의 파란색이나 허리띠의 고동색이나 코트의 묘한 노란색들만 뽑아서 보면 한마디로 그저 그렇다.

그러나 상의에 회색이 들어가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떨떠름해 보이던 여러 색들이 갑자기 서로 친해지면서, 전체적으로는 묘한 우아함이 감돌게 된다. 모두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회색의 역할 때문이다. 여기서 색의 아주 묘한 특징들을 살펴 볼 수 있다.


회색만 잘 써도 기본은 한다

회색은 주변의 색들을 압도할 정도로 화려하거나 강렬하지 않다. 색의 성질은 보통 앞으로 튀어 나오려는 정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데, 회색은 다른 색들에 비해서 앞으로 나오려는 성질이 거의 없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겸손함이 돋보이는 색이다.

이런 성격은 여러 가지 색들이 어울려 있을 때 매우 뛰어난 역할을 하게 된다. 자신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변의 색들을 중재하고 연결한다. 색으로서 회색의 가장 두드러진 면은 바로 이런 것이다.

회색은 어떤 색이라도 부드럽게 연결시킨다. 그저 연결시키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 이상으로 주변의 색들을 아주 좋아 보이게 만든다. 다음 그림을 보면 회색의 마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아함과 세련됨이 돋보이는 옷차림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옷차림이 좋아 보이는 것은 아주 미스테리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어디를 봐도 화려하고 세련된 색깔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에 입은 원피스나 밖에 받쳐 입은 옷의 색을 따로 살펴보면 화려하기는 커녕 모두 칙칙한 색깔 일색이다.

특히 밖에 걸쳐 입은 카디건 스타일의 옷의 색은 무슨 색이라고 말하기 힘든 저채도 색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더라도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색이다. 이런 색이 세련되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순전히 안에 입은 원피스의 회색 때문이다.

회색의 마력은 이처럼 그저 그런, 혹은 전혀 돋보이지 않는 색을 실제 이상으로 뛰어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회색은 패션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회색만 잘 챙겨 입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좋은 옷차림을 구사할 수 있다.


징검다리 회색

회색의 또 하나 신비로운 점은 여러 가지 색들을 징검다리처럼 연결시켜 준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회색은 주변의 색들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주변의 색들을 징검다리처럼 연결시킨다.

<그림 3>을 보면 안에 입은 회색의 상의가 보라색 코트와 오렌지색의 치마를 잘 조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여기서 회색의 상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주변의 강한 두 색깔들이 심하게 대비되면서 튀어 보였을 것이다.

<그림 3>에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우아한 느낌들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의에 회색이 들어가면서 튀어 보이는 두 개의 색들은 자연스럽게 중화되고,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색감을 보너스로 얻게 된다. 우아함을 얻고 싶거나 색상을 차분하게 중화시키고 싶을 때 회색은 마술과 같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한 특징들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다음의 패션이 아닐까 싶다.

<그림 4>의 패션을 보면 우아함이 극도로 발휘된 것을 알 수 있다. 주변의 색들을 낱개로 살펴보면 회색의 마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다. 모자나 재킷, 치마에 들어간 색들을 보면 어느 하나 두드러진 것이 없다. 오히려 앞의 디자인에 들어간 색들보다도 더 보잘 것 없다. 왜냐면 이 디자인에 들어간 색들은 거의가 같은 계통의 색들이다. 두드러질 것이 하나도 없는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상의에 회색이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전체적으로 너무나 우아하고 화려한 느낌이 우러나게 되었다. 패션에서 회색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다.

하지만 회색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회색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효과를 자아낸다. <그림 5>를 보면 거의 아무 색도 들어가 있지 않고 회색만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밝고 어두운 톤으로만 디자인되어 있는 데도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이 어떤 화려한 색들보다도 인상적이다. 회색만 잘 활용해도 패션의 리더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처럼 회색은 색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패션에 적용되면 대단히 큰 효과를 발휘한다. 화려하고 튀어 보이는 색만 보지 말고 회색의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

<다음 호에 계속>



글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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