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한복으로 황홀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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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원의 미학으로 본 패션 (26)

2009-04-18 오전 10:53:13


한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들 중에서 이영희만큼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서울컬렉션에서도 한복에서 출발한 그녀의 패션 세계는 파리나 밀라노, 뉴욕을 흠모하는 패션인들 속에서 홀로 독야청청하고 있었다. 쉬크나 골드컬러, 패셔니스타와 같은 희한한 언어들 속에서 그녀의 한복 선은 어색하게 해석되었고, 간간이 보이는 백안의 바이어들은 국적 없는 옷들에 웬지 지루해 보였다.




전통과 문화 비즈니스

프랑스의 크리스챤 라크르와나 샤넬을 맡고 있는 칼 라거펠트,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등 세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매 시즌 새로운 옷들을 무한히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천재라서가 아니라 전통이라는 자산을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디자인을 만드는 것을 전혀 특별한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사람은 펑크의 첨단을 걷는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을 하지 않을 때는 대영박물관을 찾아 옛날 옷들을 보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디자인이기 때문에 겉모습이 아무리 새로워 보여도 깊이가 우러나고 본질을 챙긴다. 파리나 밀라노가 여전히 세계 패션의 중심지가 되는 것, 서양의 복식이 여전히 세계를 주름잡는 것은 그렇게 탄탄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입고 있는 옷들은 사실 편하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서양의 전통들이 현대적으로 해석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어떤 옷이든 전통의 흐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올 봄의 유행은 어떻고, 올 겨울 유행은 어떻다고 하는 것들은 전부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흐름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21세기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옷의 유형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옷의 구조와 전통

단지 겉모습의 인상이 조금 바뀐 것을 새롭다고 하지는 않는다. 무릇 새롭다는 것은 전반적인 것, 내용이나 구조의 새로움을 말한다. 옷에 있어서 전통의 문제도 역시 옷의 겉모양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옷의 구조와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간단치 않고 어려운 것이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대부분의 옷들은 서양의 전통적인 옷들과 구조면에서 유사하다. 이것은 무늬하나, 장식하나 바꾸어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패션에서 문화나 전통을 챙겨야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도 모르게 남의 전통의 구조 속에 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새로운 옷을 만들기 위해서도 전통을 되살릴 필요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남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전통을 되살릴 필요가 더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옷에 들어가는 무늬나 챙기는 것 보다는 옷의 구조나 형태를 재창조해야 하는 문제가 전통을 회복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색이나 장식 같은 표피적인 것들은 쉽게 바꾸고 만들 수 있지만 구조의 문제는 보다 본질적이며 바꾸기가 어렵다.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비교적 일찍 이런 문제들을 정면 돌파하려 했다. 이들은 일찌감치 옷의 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서양 패션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려 하였고, 현대복식에 일본적 구조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세계 무대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전통의 현대화에 있어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영희의 패션에서도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옷에 들어가는 전통적인 무늬나 색깔보다도 고전적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에서처럼 이영희는 한복의 형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나 구조를 현대적으로 잘 소화시킨다. 상의의 재킷 같은 옷은 저고리의 라인과 너무나 닮았다. 색이나 전체적인 인상은 요즘 옷처럼 현대적이다.

바지의 형태는 대님으로 발목을 매는 남자들의 옷과 완전히 같은 구조이지만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면서 만들어지는 바지의 주름은 아르마니나 웅가로 같은 서양의 화려한 옷들에서 느껴지는 그런 우아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슴께에나 붙어야 할 고름이 허리에 달려있음으로 해서 이 옷은 전체적으로 한복스러우면서도 한복을 직설적으로 구현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옷들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지극히 여성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는 현대 복식이면서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뉴욕에서 볼 수 없는 어떤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패션 디자인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이영희는 한복의 구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현대 패션의 새로운 유형을 매 시즌 선보이고 있다. 한복을 오랜 세월을 거쳐 마스터한 사람이나 구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전통이라는 바탕이 튼튼할 때 디자인이 얼마나 파격적일 수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안정적일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현대 서양 패션의 문제점과 우리의 전통

요즘 서양의 패션 디자인계는 20세기 초 샤넬이나 60년대 프랑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행보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기존의 프랑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행보들이 예전 같지 않으며, 그 공백을 북쪽에서 내려온 디자이너들이 많이 채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디자인 파워도 샤넬이나 입생 로랑, 크리스찬 디오르의 전성기에 비하면 낙제점에 가깝다. 강렬한 이미지도 없고 멋진 스타일도 보이지 않는다. 다양해 보이긴 하지만 많은 경향들이 해체적이고 어두운 뉘앙스들로 가득차 있다. 이런 시기를 미술사에서는 대체로 매너리즘 시기라고 한다.

어느 문화든 제한된 수명이 있다. 사실 100여 년을 입어왔으니 서양의 패션도 이젠 지칠 만도 하다. 그 틈새로 동아시아의 전통들이 약간의 활기를 제공하고 있다. 여러 개의 천을 이어붙인 그런지 룩, 여러 개의 옷들을 겹쳐 있는 레이어드 룩 같은 것들은 사실 동아시아의 옷들이 가졌던 특징들이며,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향들이 요즘은 급격하게 서양의 패션 전통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런 국제적인 경향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제 막 한국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재해석하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대장금이 국내는 물론 널리 아랍 문명권에 까지 히트를 치는 것은 단지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극이 나오고 있고, 많은 역사서들이 베스트 셀러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대중들은 준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순한 국수주의자들이 아니라 해외 명품은 이미 다 써 보고 이제는 자기만의 특별한 것을 원하는 단계에 올라서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디자인하는 사람들이나 패션 산업은 아직 이런 현실의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이영희 같은 디자이너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희망을 갖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글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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