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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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원의 미학으로 본 패션 (25)

2009-04-10 오후 4:34:55




2009/10 F/W 서울컬렉션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단순히 참가하는 디자이너의 숫자로 파리·밀라노·런던·뉴욕·도쿄 등 세계적 컬렉션들과 견줄 수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패션이 문화를 소재로 한 산업의 성격이 짙다고들 말하지만 역시 이번 컬렉션에서도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디자이너들의 빈곤한 상상력과 살얼음처럼 얇은 개성, 그 위를 덮은 각종 매체들의 프레쉬 세례와 연예인들의 등장은 그나마 런 웨이-그냥 모델들이 걸어 다니는 길-로 향하는 시선을 막아 주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희한한(?) 사람들은 작품을 보러 왔다기보다는 성대한 파티에 참여한 것처럼 보였고, 고막을 울려주는 요란한 소음과 8등신 모델들의 걸음걸이에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우리가 지금 입고 다니는 옷들이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패를 ‘서울컬렉션’이라고 걸었다면 뭔가 한국의 냄새라도 피워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디자이너의 작품들이나, 쇼를 보러 온 사람들이나, 매체들의 취재 태도를 보면 아예 서울컬렉션이 아니라 ‘뉴욕컬렉션 2’라고 비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과연 파리나 밀라노, 뉴욕컬렉션의 짝퉁 같은 쇼를 보러 서울까지 날라 올 해외의 프레스나 바이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미 1966년도부터 파리나 밀라노 한복판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표출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참으로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마 이 서울이라는 도시,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 한복판에서 그래도 때 묻은 한복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영희라는 디자이너가 있어서 미래에 대한 꿈을 접지는 않게 된다. 이번 컬렉션에서도 역시 그녀는 한복을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 고유의 패션을 선보이면서 차별화와 독창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었다.

한복쟁이 이영희. 꽃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컬렉션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패션이 근본적으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 문화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회색, 저채도 색의 우아함

거의 모든 패션 디자이너들이 색에 있어서는 천부적이지만, 이영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역시 색이다. 이영희 자신이 밝혔듯 그녀는 회색을 좋아한다. 그녀의 옷에는 예나 지금이나 회색이나 회색에 가까운 색들이 많아 우아하고 청초한 느낌이 가득하다. 이 부분이 그녀의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회색 조의 색들은 원래 우리나라 전통 한복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색이다. 색을 보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5행의 원리에서는 회색이 카운트 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는 회색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념성이 약했던 일본에서는 무채색이 강한 땅이나 나무의 색깔 때문에 오히려 회색이 섞인 색을 많이 썼다. 그런데 회색이 들어간 저채도, 혹은 중채도의 색들은 원색에 비해서 품위가 있어 보이고 주변의 색들을 중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회색 계통의 색이 많이 들어간 그녀의 패션들은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남다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정통 한복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한다. 모두가 색을 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회색과 같은 저채도색을 쓰더라도 비슷한 색을 쓰는 일본과는 확연히 다르게 쓴다. 채도가 낮긴 하지만 그녀의 옷들에서는 여전히 한국적 감성이 자욱하게 배어 나오는 색들로 채워져 있다.

5방색을 하나도 쓰지 않았으면서도 더 없이 한국적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은 바로 색의 밝기에 있다. <그림1>을 보면 옷을 구성하는 색들이 대체로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에 입은 티가 좀 밝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색의 뉘앙스가 어둡고 깊어 보이는 것은 같다. 회색 계통의 색을 쓰더라도 약간 어둡게 쓰는 것이 이영희의 특징이다. 이것은 저채도나 중채도의 색들을 중간 정도나 그 이상으로 밝게 쓰는 일본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색을 이렇게 쓰기 때문에 깊이 우러나는 맛이 생기고 색에 깊이가 생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색들이 어둡긴 해도 그렇게 칙칙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색조의 색인 것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영희의 색들은 검은색이 섞여서 어두워지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다소 색이 어두워 보이긴 해도 원색의 맑은 느낌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영희의 패션의 색은 맑으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런데 옛날 그림들을 보면 대개 이런 식으로 색을 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림2>의 민화를 보면 붉은 색과 노란색 등의 원색들 뒤로 시원하면서도 품위 있는 느낌을 주는 색이 눈에 띈다. 이영희의 색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색이다. 거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색이긴 하지만 묘하게도 바닷물처럼 맑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검은 색이 많이 들어가서 어두워지기만 하고 색의 맑은 느낌은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준다. 이영희의 접근방식과 거의 다름이 없다. 이영희는 한복에서부터 시작했음에도 한복에서 전형적으로 쓰는 색을 쓰지 않았지만 이렇게 색을 쓰는 방식이나 감각이 우리나라 전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전통 한복의 이단아’가 아니라 좀 더 폭넓은 전통에 입각하여 한복의 가능성을 확장한 ‘고전주의자’라 할 수 있다. 5방색이라는 다소 도식적인 색 원리를 그대로 쓰는 대신에 맑고 깊은 맛이 나는 우리의 색을 추상적으로 해석하여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창조한 것이다.

전통이란 곧이 곧대로 화석처럼 도용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재창조하고 재해석하였을 때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영희는 색깔 하나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다른 디자인들도 색이란 점에 있어서는 이렇게 전통의 본질을 통찰력있게 재해석하고 있어서 어디에서도 본적은 없으나 한국적인 느낌이 현대적으로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후배 디자이너들이 보고 또 보면서 배워야 할 원리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왜 그렇게 서쪽으로만 향해 있는지… 이영희의 또 다른 매력이라면 바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됨을 보여주는 형태라고 하겠다.

<다음 호에 계속>



글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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