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카펫은 이제 시상식이 아니라 패션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초현실적인 미인들이 가격이나 모양새에 있어 역시 초현실적인 드레스를 입은 모습들은 살아있는 신화 그 자체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자태들을 감상할 수 있으니 누가 마다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여배우들이 입는 드레스는 내가 입었을 때와는 다르게 왜 그렇게 화려하고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단지 잘 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입어서일까?
아니면 레드카펫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때문일까? 거기에는 반드시 조형적인 이유가 있다. 환상적인 아름다움 뒤에는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원인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우리의 눈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종종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이들의 가치를 베스트 워스트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패션 전문가들의 언설들을 보면 좀 안타깝다.
과연 무엇 때문에 베스트 워스트가 나누어지는지, 과연 어떤 논리로 그런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알기 어렵다.
근거 없는 수많은 형용사들로 베스트나 워스트가 나누어질 때는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의 교양이나 안목의 수준이 워스트로 보일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이유가 아니라 느낌으로 판단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이 그런 평가들이 옷 입은 사람들에 대한 독설 이상의 어떤 것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침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며칠 전 열렸다. 레드카펫 의상이 왜 멋져 보이고 이상해 보이는지 차분하게 조형적으로 따져가며 분석해보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어떤 문법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독설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대칭선이 주는 드라마틱한 효과
사람의 몸은 대칭이다. 따라서 옷도 보통은 대칭이다. 대칭 형태는 단단하고 엄격한 느낌을 주는 형태이다. 그런 특징 때문에 변하지 않은 진리를 추구했던 그리이스 때부터 대칭 형태는 열렬히 환영 받았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 많은 그리이스, 로마시대의 건물들을 보면 거의 대칭형이다.
반면에 비대칭 형태는 변화무쌍하게 보이며, 리듬이 만들어지는 특징이 있다. 특히 옷이 비대칭 형태일 경우에는 그 파격미는 매우 돋보이게 된다. 이번 시상식에서 그러한 비대칭의 매력을 한껏 발한 사람들이 있었다.
파랑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손예진이 먼저 눈에 띄었다. 비대칭선으로 한 쪽 어깨를 드러내고 귀거리, 목걸이 없이 큼직한 보석 브로치로 포인트를 줬다. 그녀의 옷이 전체적으로 어딘가 신화에 나올 듯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는 옷의 윗부분이 비대칭적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상의를 대각선으로 가르는 동세가 상체 위를 강하게 흐르기 때문에 아주 우아하면서 역동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비대칭형이기 때문에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보인다는 장점까지 챙겼다.
몸을 돌려 팔이 가려진 왼쪽에서 바라보면 몸 전체가 천에 싸여 답답해 보이다가도 몸을 살짝만 틀면 얼굴과 목, 오른팔로 시원하게 빠지는 시선이 드라마틱한 효과를 자아내게 된다. 한 벌로 두벌 이상의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상체에 비대칭적 선으로 깔끔하고 우아한 느낌을 준 손예진이 있다면 공효진은 펑크의 여신쯤 되겠다.
전체적으로는 X자 구조로 된 옷을 입었지만 목과 가슴 선, 그리고 앞쪽부터 뒤에 까지 비대칭으로 길게 내려오는 치마의 끝단이 자유분방한 느낌을 자아내면서 전체적으로는 대칭적이면서도 비대칭적인 느낌을 만들고 있다.
상당히 수준급의 조형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 상의 부분엔 프린지 장식(올 풀림을 방지하는 술 장식)을 하는 등 전체적으로 풍성하고 복잡한 실루엣을 표현하고 있지만 드레스 전체는 하얀색으로 통일하여 정리된 느낌을 주고 있다. 사선으로 길게 내려오는 치마의 밑단 선은 하체에 강한 동세를 불러일으켜 키를 더 커 보이는 게 하고 있다.
그에 비교해 봤을 때 신봉선의 의상은 조금 아쉽다. 화려한 반짝임의 시퀸 소재로 본래 몸의 윤곽에 혼란을 주어 환상적인 효과를 주지만 밑단이 위의 두 배우처럼 사선으로 처리가 되었다면 다리를 가려주면서 더 길어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허리의 빨간 리본이 상의와 하의 길이를 반반으로 나누는 것 도 좀 아쉽다. 긴 막대기도 여러 번 잘라 버리면 짧아지지 않은가? 게다가 허리의 가로선은 어깨를 가로로 더 길어보이게 만들어서 상체가 커 보인다.
끝을 애매하게
옷은 결국 고차원의 착시효과다.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옷이 맡은 최고의 임무라 할 수 있다. 신체를 더 길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중요한 덕목에 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길어 보일 수 있을까? 형태는 항상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런데 시작과 끝이 분명한 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론 그 끝이 희미해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 채워 질 때 큰 효과가 발휘될 수 있다.
여백미가 그렇다. 동양화의 여백미야 말로 보는 사람이 채워서 보는 것이다. 하얗게 비워진 바탕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강으로도, 호수로도, 바다로도 해석이 가능할 때 무한한 신비감이 만들어지게 된다. 옷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끝을 희미하게 희석시키게 되면 특히 신장을 길어보이게 할 수 있다. 윤은혜와 신애의 드레스가 그랬다. 먼저 윤은혜는 튜브탑에 밑단은 풍선처럼 둥근 실루엣을 형성하는 벌룬형의 미니 원피스를 입었다. 튜브탑 원피스는 어깨선 없이 가슴과 엉덩이만 가리는 형태로 섹시함 말고는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 밑단을 벌룬 스커트 식으로 풍성하게 만들어 귀여운 느낌을 더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다른 여배우들이 튜브탑 원피스를 고르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윤은혜의 의상이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긴 천 하나를 드리웠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진 천 하나가 짤막해 보일 수 있는 드레스에 길게 시선을 아래로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이로 인해 평범해 질 수 있는 드레스에 깊이감과 길이감이 생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애의 누드톤의 드레스의 첫인상은 평범함이었다. 하지만 옆으로 돌렸을 때 길게 늘어진 천이 윤은혜의 의상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속이 비치는 소재를 여러 겹 겹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많이 겹쳐진 안쪽은 불투명하지만 가장자리로 갈수록 투명해지면서 윤곽선이 희미해져 환상적으로 보이게 된다.
‘끝을 애매하게’라는 법칙에 입각해 보면 김지수, 박보영의 드레스는 색으로 비슷한 효과를 얻고 있다. 김지수의 빨간 드레스는 레드카펫과 연결되어 그녀의 키를 더 길어 보이게 하고 있으며, 박보영의 드레스는 전체의 5분의 1쯤 되는 밑단 부분에 빨간 무늬를 넣어 레드카펫과 연결하고 있다.
만약 밑단 부분이 다른 색이었다면 시선을 잘라 키가 작아 보였을 테지만 이 드레스는 레드카펫이라는 장소와 잘 맞아 떨어져 단순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좋은 결과를 냈다.
이처럼 의도한 결과였든, 우연의 효과였던 배우들의 옷차림들은 조형적으로 대단히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잘 새겨 놓는다면 앞으로 레드카펫만 부러워하고 있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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