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감으로 쓸 것인가, 지우개로 쓸 것인가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 새하얀 도화지 위에 마구 문질러본 기억을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형형색색의 물감이 흰색 도화지 위를 덮다보면 어느새 물감들의 궤적은 사라지고 멋진 색깔이나 멋진 모양이 나타난다. 같은 종이에 같은 물감으로 그리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이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진다. 이런 마술이 또 있을까? 스카프가 그렇다.
계절이 바뀌면 옷장 앞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입을 옷이 없어! 도대체 작년에는 뭘 입고 다닌 거야?’ 하지만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새로운 가을 코트나 카디건을 사자니 불황의 그늘로 쉽게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
일교차도 많이 나서 낮에는 덥고 아침, 저녁으로 어깨가 시릴 때, 가을을 느끼고는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막막할 때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스카프, 머플러. 더 넓게 생각하자면 큰 천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성의 스카프를 목 주위에서만 기생하는, 옷의 사촌, 액세서리의 사돈 정도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옷에서 스카프는 도화지에서 물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옷이 하얀색 도화지라면 스카프는 그 도화지 위를 마음대로 그려가는 물감이다.
그런데 문제는 옷에다 어떻게 그려가는 가에 따라 명작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에서 파는 싸구려 이발소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카프를 할 때는 누구나 멋진 그림을 바라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 단지 화려한 장식을 첨가하는 정도로 스카프를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가능성은 낮아진다.
우선 스카프를 하나의 물감으로 옷을 도화지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칠하라
일반적으로 목이나 어깨에 둘러서 포인트를 주는 용도로 생각하지만 스카프를 일종의 물감이라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선을 긋던, 면을 칠하던 그것은 당신 자유다. 어깨쪽을 넓게 칠할 수도 있고 벨트처럼 좁게 배에 둘러 신체를 상. 하로 나눌 수도 있다.
스카프를 풀어서 어깨나 허리 등을 감아보자. 커다란 면이 무덤덤한 옷을 맛깔나게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보자. 블랙 라운드 티셔츠에 진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다. 도화지에 물감을 칠하듯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카프를 둘러보자. 목이나 어깨에 한정하지 말고. 이렇듯 스카프 한 장의 포스는 단지 목에 두르는 스카프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스카프로만 한정 지었을 때는 이런 가능성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스카프의 가능성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혹은 여러 가지 재 료를 섞어 멋진 조각을 만드는 조각가의 심미안을 통해서만 그 가능성이 발견된다. 평범한 옷이 스카프를 어떻게 걸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옷으로 변하는 것이다.
액세서리와 스카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액세서리를 점이라면 스카프는 면도 되고 선도 되고 색도 자유롭게 되는 물감이다.
지워라
화려한 프린트의 옷을 입었을 때 그 복잡함을 상쇄시키는 용도로 스카프를 활용할 수도 있다. 지우개로 복잡한 부분을 지운다는 느낌으로. 이번에는 강렬한 기하학 프린트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성이 종이 위에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막 껍질을 벗겨낸 새 지우개로 원하는 부분을 자유롭게 지워내 보자. 넓게도 지우고 세밀하게도 지우고. 옷이라는 틀에 갇히지 말고 정말 자유롭게 말이다. 그것이 스카프가 둘러질 곳이다. 어떤가. 틀에 갇혀 스카프를 둘렀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들이 쏟아지지 않는가.
덧칠하라
이번에는 난이도가 조금 높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무늬가 예뻐서 샀지만 너무 화려하거나 과해서 손이 자주 가지 않는 옷이 있을 것이다. 이 느낌을 조금 희석시키기 위해 위에서 말한 지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에 못지않은 강렬한 무늬를 덧칠해서 중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일정한 공식을 세워놓고 덧칠을 해야지 아무런 기준 없이 겹치기만 한다면 당신은 센스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딱 좋다. 무난하게 보이고 싶다면 원래 입은 옷에 있던 무늬 중 한 가지 색이 포함된 스카프를 두르면 된다. 더 복잡한 무늬를 더해서 과한 느낌을 희석시키고 싶으면 무늬의 크기를 대조시키거나 보색 대비나 명도 대비가 큰 스카프를 겹쳐 보자.
예전 같으면 옷의 가격표만으로도 치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값비싼 협찬 옷을 입더라도 워스트에 랭크되는 연예인들이 속출하는 시대이다. 브랜드나 가격이 아니라 자신의 교양으로 치장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동안 많은 패셔니스트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유행 따르느라, 8등신 연예인들 따르느라 많은 고생들을 해왔다.
이제는 스카프를 하나 두르더라도 화가의 마음과 눈으로 자기에 맞는 최고의 예술적 표현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매연 가득한 강남을 벗어나 광활한 예술의 세계로 거닐면서 자신의 교양과 품위를 한껏 고양해보시길…
글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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