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를 말하면 ‘앙드레김’을 연상한다. 칠순에 이르는 그는 아직도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를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앙드레김의 디자인은 예술성 면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상업성 면에서는 평가가 달라진다. 우리는 ‘앙드레김’ 이외에 누구를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몇 명의 국보급 디자이너를 보유하고 있는가?
최근 모 잡지에 소개된 기사에 따르면 아시아 최대 디자인 전문업체인 노바디자인의 천원룽 사장이 중국, 한국, 유럽의 디자인 수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한다. “산을 처음 봤을 땐 산이 아니고, 두 번째 봤을 때는 산이다. 그러다 세 번째 보면 다시 산은 없다(見山不是山, 見山是山, 見山不是山).” 즉, 중국은 아직 디자인이 무엇인지 잘 모르며, 한국은 디자인을 알지만, 유럽에서는 디자인을 말할 필요가 없을 수준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디자인 수준을 비평한 말이기도 하고 중국인들에게 디자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5년 이내 우리의 가장 강력한 패션 경쟁국으로 부상할 중국이 정말로 디자인을 모르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중국보다 디자인의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중국은 전 세계 공장의 70%를 차지하는 거대한 산업기지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수 년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을 삼킬 위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중국의 디자인 발전속도는 무섭다. 2000년 중국의 디자인학과 졸업생은 1천500여 명이었지만 올해 무려 400여 개 대학에서 3만여 명을 배출한다고 한다. 5∼6년 사이 20배가 늘었다. 중국의 명문 항저우 중국미술학원(중국은 학원이 대학임)에만 6천 명이 재학 중이다. 다시 5~6년이 지나면 디자인 인력은 매년 수십만 명이 쏟아져 나올는지도 모른다.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의 한 드라마는 ‘유럽에서 2년 걸리는 냉장고 디자인을 한국과 일본에서는 1년이 걸리고 중국은 90일이면 족하다’는 대사를 내보내고 있다. 필자가 본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포토샵을 자유자재로 운용해 디자인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만 중국의 디자이너들은 보편화되어 있다. 이미 신세대 디자이너들의 경쟁력이 뒤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에 비하여 디자인의 낙후를 인정하지만 “5년 안에 따라잡는다”고 자신한다. 중국에 패션 영업 경험이 있는 필자는 3년 전 중국의 대표적 남성복 패션 기업 S회장이 우리 회사를 방문해 디자인실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했던 일을 기억한다. 그는 우리 디자인실을 중국에 옮겨놓고 싶다고 몇 차례나 말했다. 그 즈음 중국의 패션 사업자들은 한국에 사무실을 내고 매월 1∼2차례 한국에 출장을 나오며 한국 디자인 카피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한국 출장은 매우 뜸해졌다. 중국 S회장도 한국 패션 기업에 별 관심이 없어졌다.
불과 2∼3년 사이 중국 패션 기업들에게 한국 디자인이 그만큼 무의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중국의 역습이 시작되고 있다. 이미 국내 브랜드도 생산 면에서는 제품의 70∼80% 이상이 중국산이지만 이제 중국인이 디자인한 중국 패션 브랜드가 한국에 속속 밀려올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의 엄청난 물량공세와 인해전술에 대처할 묘책이 있는가? 불과 몇 년 후 FTA와 함께 중국의 대공습이 본격화되면 한국 백화점은 물론 패션몰, 재래시장 할 것 없이 패션 마켓 대부분이 중국 브랜드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대책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여전히 산자부 산하 패션산업 관련 부서는 패션산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전임자들의 빈약한 기획안을 들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한국 패션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섬유산업협회, 한국패션협회, 한국의류산업협회 등 숱한 패션산업 관련 단체들은 직함만 걸어놓고 한 달에 한두 번 나오는 ‘회장님 모시기’ 외 뚜렷이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지금 우리에겐 패션 디자인 혁명이 필요하다.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