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1990년대를 통하여 가장 성공한 미국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도나 카란(Donna Karan)이다. 그녀의 성공은,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아낀 소속사 앤 클라인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그녀에게 패션사를 설립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도나 카란은 1985년 독립하자 자신이 추구해 왔던 ‘고학력, 고수입’의 전문직 여성들을 표적 고객으로 삼아 이들에게 감성적이면서 지적인 여성미를 부각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해 몸의 곡선이 부드럽게 살아나는 드레이퍼리 스타일과 소재를 보석이나 핸드백, 벨트 등 돈나캐런 상표의 액세서리와 조화시켜 디자인했다. 이는 ‘성공한 여성’을 상징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던 시기와 맞물려 크게 히트했다.
그녀의 패션이 글로벌시장으로 확장되고 있을 무렵인 1997년, 우리는 IMF로 많은 것이 변했다. 이후 우리 사회에 가장 유행했던 말 중의 하나가 ‘구조조정’이다. 기업이나 정부 할것없이 모두들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특히 기업들은 살아 남기 위해 저마다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각 기업들은 우선 사람 수를 줄였고 비생산적인 사업부는 폐지하였다. 이 같은 구조조정은 패션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본력이 짧은 ‘디자이너 브랜드’는 대거 자취를 감추고 ‘카피’로 매출경쟁에만 매달린 ‘내셔널 브랜드’들만 살아 남았다. 그 결과 패션계를 비롯한 우리의 기업들이 외견상 견실해졌다. 그리고 젊어졌다. 생산성이 높아졌다. 비만하고 방만했던 기업조직들은 스마트해졌고 민첩해졌다. 그 동안 구조조정은 우리 사회에서 ‘만병통치약’과 다름없었다. 과연 그럴까? 구조조정 이후 5년, 우리는 지금 심각한 구조조정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구조조정은 우리 기업에서 50∼60대를 모두 몰아냈다. 그들은 모두 실업자가 됐다. 40대의 태반이 직장에서 밀려났다. 경영합리화란 이유로 우리기업에는 ‘퇴직금’이 사라졌다. 이제 직장인들은 퇴직을 해도 가진 돈이 없다. 구조조정으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30세가 다 되어 겨우 직장을 얻었다가 40세가 넘으면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다. 우리 패션계는 어떤가. 긴 불황과 구조조정 환경 속에서 이뤄진 ‘가차없는 디자이너 목치기’가 자행됐다. 우리 패션계는 소속사에서 3년을 일하는 경우가 드물다.
패션사들은 ‘카피’ 경쟁으로 매출을 연명하고 있다. 디자이너의 기능은 ‘전 소속사에서 잘 팔리던 아이템을 팔고 카피 잘하면 그만’이다. 이 같은 풍토에서 기업주들은 ‘3년이면 알맹이는 다 빼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약간의 매출감소만 보여도 디자이너 자리는 사람이 바뀌고 만다. 우리 디자이너는 27∼30세에 겨우 스타일을 그리기 시작해 33∼35세면 디자인실장이 된다. 그리고 2∼3년 활동한다. 우리 디자이너의 실질 수명은 5∼8년에 불과하다. 아주 인정받는 소수는 40대 중반까지 기획이사, 감사 등의 직함을 가지고 ‘카피 경쟁’을 벌이며 불안한 생명을 연장한다.
패션기업의 사장들은 디자이너를 일회성 ‘디자인 기능 보유자’로 여길 뿐 그들의 가치를 투자하고 양성할 만한 ‘기업가치’로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동반 성장하려는 의식 자체가 없다.
디자이너들 사이에도 자주 자리를 바꾸는 것을 ‘이력관리’로 생각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취직한 지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새 자리’가 나면 자리를 털고 이직을 하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글로벌시대에 분명한 것은 ‘차별화’하지 않는 브랜드는 살아 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브랜드가 차별화하려면 디자이너의 개성이 묻어나와야 한다.
디자이너의 개성은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 패션계도 디자이너를 ‘투자하고 키워야 할 기업가치’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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