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복 패션회사의 수석디자이너 연봉은 보통 8∼9천만 원이나 된다. 1억 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 그녀들의 나이는 대략 40∼45세다. 학력은 전문대학에서 지방대학 졸업자들이 많다. 이들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임원 연봉을 넘는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연봉이 많다고 생각지 않는다.
패션학도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유능한 디자이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패션학도는 디자이너가 되지 못한다. 디자이너가 되지 못하는 패션학도는 다른 직업을 택하거나 패션계의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실패한 인생으로 남는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모 교수께서 한 말씀이 생각난다. 명문 S대학에 출강하시는 교수님은 어느 날 패션마케팅 전공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한 한 학생의 상담신청을 받았다. “MD일을 하고 싶은데 취직하기가 너무 힘들고 대신 모 백화점의 판매사원 자리가 났는데 가도 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마케팅을 공부한 사람으로 좋은 기회가 되겠다”며 주저없이 취업을 권고하셨다. 그러자 학생은 ‘명색이 명문대 대학원 졸업생인 내게 판매사원을 하라 하시다니’라며 불쾌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다. 그러나 그녀는 판매사원으로 취직했고 처음에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은 재미있었고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본사에서, “본사에 들어와서 MD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본사에서는 마케팅을 전공한 데다 현장에서 영업실무를 해본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본인이 그렇게도 해보고 싶었던 MD 자리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MD를 마다하고 판매사원을 계속하다가 지금은 외국의 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휴가철이다. 차를 몰고 가다보면 지방의 시·군 어느 곳에서나 ‘??대학교’의 간판을 쉽게 만난다. 웬만한 지방 소도시에도 몇 개씩의 대학이 소재하고 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대학들이 무수히 많다. 아무튼 지금은 심한 말로 ‘밟히는 게 대학’이다. 그만큼 대학생도 늘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또래 10명 중 8명이 대학에 진학한다고 한다.
이처럼 대학교육이 ‘보편적 국민교육’이 된 지금 대학 졸업장이 취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기불황 때문에 기업들은 사람을 뽑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돌아갈 자리는 너무나 없다.
패션 유관 학과도 예외는 아니다. 패션 유관 학과로 분류되는 의상학과, 의류학과, 디자인학과, 섬유공학과, 미술학과 등에서 배출되는 인원은 연 5천 명이 넘는다. 이들 중 패션계로 자연스럽게 취업하는 숫자는 극히 적다. 인원이 30명 남짓한 패션회사의 일년 매출이 2천억 원을 넘는 시대다 보니 사람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패션학도 대부분이 디자이너가 꿈인 게 현실이지만 디자이너가 되는 길은 너무도 어렵다.
그런데도 패션학도들은 디자이너만 고집한다. 또 패션학도들 사이에는 패션마케팅이 최고 인기전공으로 부상하고 있다. 패션사의 기획실에 앉아서 컴퓨터를 두드리는 모습이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MD 자리는 ‘꿈’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MD만 고집한다.
왜 그런가. 대학의 그릇된 교육 탓이다. ‘엘리트’로 교육받은 대졸자들은 ‘격에 맞는 자리’를 마음에 그리고 그 외는 취직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30∼35세의 유능한 판매사원의 연 수입은 중소기업의 임원 연봉을 넘는다. 그런데도 패션업계에는 판매사원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대졸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유능한 샘플 미싱사의 연봉은 보통 3천∼4천만 원이나 된다. 기술직이므로 기업의 구조조정 등 외풍을 거의 타지 않는다.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다.
그럼에도 역시 미싱사나 봉제 보조를 배우려는 대졸자는 없다. 영업을 잘 아는 MD, 봉제를 잘 아는 디자이너라면 어떨까. 이제 우리의 대학도 대학생이 엘리트가 아님을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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