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고 잔혹한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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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2013-08-26 오후 6:24:22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어느 날 갑자기 한 신진 디자이너에게 국내 유명 백화점에서 연락이 왔다. 디자인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놀랍게도 “백화점에 매장을 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백화점측 말로는 “기존의 한 중견 브랜드가 철수하는 꽤 괜찮은 자리에 매장을 내어 줄 수 있다”는 거였다. 이 달콤한 기회를 거절할 디자이너가 있을까. 그렇게 희망차게 백화점 영업을 시작한 디자이너. 그에겐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얼마 전 모 백화점에 들렀다가 아마도 위의 맥락에서 입점하게 되었을 어느 신진 디자이너의 매장을 보게 되었다. 본래 제법 잘 알려진 내수 브랜드가 있던 자리였건만, 어느 틈엔가 이 디자이너의 매장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디자인은 신진답게 참신하고 캐릭터가 강했다. 그러나 어쩐지 이 매장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디자인의 지나친 반복성. 즉 넓은 매장을 채우기에는 디자인 수가 너무 부족했고, 이를 메우려다 보니 계속 비슷한 스타일과 프린트가 반복적으로 행거를 채우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는 디자이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 내수 브랜드들은 십여명의 디자이너들이 시즌 당 200~300개 가량의 스타일들을 디자인해낸다. 엄청난 스타일 개수, 매주 신제품을 출시하는 물류 구조, 비인기 상품을 할인 처리하는 마케팅 기술 등으로 무장한 내수 브랜드가 채우던 매장을, 한 명이나 두 명이 팀을 이뤄 시즌 당 20~30 스타일을 작업하는 신진들에게 채우라는 건 어찌 보면 애초부터 무모한 발상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진들의 옷은 누군가 사주어야 하고, 편집을 해주어야 한다. 누군가 선주문을 해준다면, 신진들은 한 시즌에 제시한 20~30 스타일 중 10스타일에만 주문이 몰려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


물론 어떤 디자이너는 혼자서 적극적으로 매장을 채워보겠다고 노력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타일 수를 늘리고,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알찬 매장을 꾸미려고 노력한들, 한 시즌 뒤에 그들에게 남는 것은 엄청난 재고들일 뿐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다음 시즌을 위해 또 그만큼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 바로 이것이 오늘날 각 브랜드들을 고사시키는 왜곡된 공식이 아니던가. 신진들마저 그런 환경으로 내몰리는 것은 업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국내에서는 바잉과 편집의 범위가 아직도 지나치게 작다. 어떤 디자이너도 모든 아이템을 다 골고루 훌륭하게 디자인하지는 못한다. 원피스만 잘하는 디자이너, 재킷을 멋지게 뽑아내는 디자이너, 팬츠나 티셔츠를 잘하는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잘하는 품목만 판매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 그리하여 매장은 각자 강점이 있는 디자이너들로부터 뽑아낸 엑기스 제품으로 구성되는 구조가 되어야만 디자이너도 살고 소비자도 지갑을 연다. 가장 멋진 원피스, 가장 멋진 재킷, 가장 멋진 티셔츠로 무장한 매장이니 소비자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체 기본 바지나 기본 티는 왜 그렇게 모든 브랜드에 걸려있어야 하는걸까. 이런 필요악들을 생산하는 것은 곧 엄청난 재고를 양산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쩔수 없는 이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 아이템을 구매하고 편집해주어서, 각자 소품종의 아이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재고의 늪, 물량의 늪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불황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또 한번의 기회이기도 하다. 만약 누군가 내수 브랜드들에게도 이렇듯 바이어로서 접근을 해주었다면, 오늘날의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을지 모른다. 그들 또한 출범 당시에는 디자이너 브랜드와 다를 바 없는 개성과 패기를 갖추고 있었지만 독자적으로 전 아이템을 생산하고 운영하는 것은 결국 몰개성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결론은 오래 전에 내려졌다. 용단을 미룰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한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소희 말콤브릿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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