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남양유업 사태로 갑을간의 불공정 거래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국내의 프랜차이즈라는 업체들 대부분의 계약 형태에 이런 불공정 관행이 만연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이상하리만치 근절되지 않는다. 갑은 끊임없이 만행을 고집하면서 을이 되겠다고 그들을 찾아가는 사례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을이 되려 할까.
전에 어떤 강의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식당을 차리고 싶다면, 남의 식당에서 2년만 일해보라고 말이다. 2년만 일해보고 창업한다면 위험부담이 70% 이상 줄어든다고 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충분한 사전 조사와 경험을 구축한다는 것이 너무도 마땅한 일이건만,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어쩐지 경험이 부족한 자신으로서는,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 온 자신으로서는, 그 길은 갈 수 없는 가시밭길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 슬픈 오류다. 알려져 있는 바른 길을 앞에 두고도, 사람들은 ‘개런티’를 주면서까지 누군가에게 쉽게 예속되길 원한다. 본래 나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 사기의 본질이다. ‘내가 다 해주고, 내가 다 벌어줄 테니, 너는 그에 대한 수수료만 내라’는 제안이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가시밭길을 가지 않아도 되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들은 말로만 컨설팅할 뿐, 아무런 법적 의무도 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심리는 우리의 사업구조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속으로 어딘가 불공정하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백화점에 입점하고 싶어하는 심리. 스스로의 아이디어로 론칭하기 보다는, 잘 나가는 브랜드들을 흉내내는 것이 안전해 보이는 심리. 바로 그런 심리가 우리를 을의 위치, 만년 이류, 삼류의 위치로 강박시키고 있다.
혹자는 너무 위험이 큰 길을 갈 수는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누가 위험이 큰 길을 가라고 하였는가. 혁신의 본질은 ‘모 아니면 도’의 도박이 아니다. 도리어 매우 우직하고 지루한 노력, 그리고 마땅한 시간을 요하는 충실한 작업들로 이뤄진 것들이다. 혁신이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전략이라고 정의하는 학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혁신=위험이란 오해가 만연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게이오 백화점의 리뉴얼 성공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변에 신주쿠 다카시마야가 크게 오픈하면서 젊은 고객을 완전히 빼앗긴 게이오 백화점은 한 때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백화점에 젊은 층이 많아지는 추세를 지켜보며, 자신들은 오히려 시니어백화점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일본의 시니어 세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쇼핑 거리인 지장대로를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대체 이 거리의 무엇이 시니어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알기 위해 게이오 백화점이 공을 들인 시간은 무려 2년이었다. 이들은 지장대로를 보고 베끼지 않았다. 지장대로 상인협회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물품의 구성과 진열형태, 상인협회가 공동으로 유지하는 길드의 룰, 시니어 세대들을 위한 서비스 마인드를 하나하나 연구하고 배워나갔다. 그 결과 게이오는 신생 백화점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리뉴얼 해냈다. 낡은 백화점의 놀라운 혁신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시니어 백화점의 대명사가 된 게이오는 고객의 70%이상이 시니어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례는 혁신이란 눈깜짝할 묘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피터 드러커의 말대로, ‘뚜렷한 목표’와 ‘고된 노력’만이 혁신을 사업적으로 이끌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성장률 0%의 성숙한 사회에서 무언가 답을 얻고자 한다면, 그저 제대로 하고, 들여야 할 노력과 시간을 마땅히 들이는 수밖에는 없다. 재빨리 하려는 마음, 개런티된 길을 가려는 마음을 원천적으로 버리지 않는 한, 아프리카나 중국으로 이민을 가는 길 외에는 뾰족한 수 같은 건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혁신을 다룰 때 쓰는 용어 중에 ‘혁신저항’이란 단어가 있다. 조직 내에서 혁신을 이루고자 할 때 따른 심적, 혹은 구조적 저항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혁신을 마주하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자질, 우리의 ‘을’ 근성, 우리의 나약함과 얄팍함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혁신은 미련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곱씹어야 할 시점이다.
김소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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