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이 어렵긴 어렵나 보다. 고고(?)하기만 하던 몇몇 톱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고객사은대행사’라는 미명 아래 폭탄세일을 실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IMF 때에도 꿈쩍하지 않던 디자이너들이 ‘창고대방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일할 정도로 현 상황이 IMF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회사나 브랜드를 정리할 때 등장하는 ‘창고대방출’이라는 용어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광고에 등장하다니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최근 본지가 입수한 디자이너 박항치와 설윤형의 일간지 삽입용 광고전단에는 30∼90% 세일에 균일가 가격도 투피스나 바지, 티셔츠가 최소 3만∼5만원이다. 중저가 브랜드의 세일로 착각이 들 정도다.
사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시장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 위기는 너무 곪아 ‘손대면 톡 터질 것만 같은’ 봉선화 연정이랄까. 한마디로 비상구가 없어 보인다. 현재 세계 패션계는 LVMH 그룹과 구찌 그룹으로 대표되는 럭셔리 마켓과 자라와 H&M으로 대변되는 중저가 마켓으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 최근 샤넬의 카피 브랜드로 지탄을 받던 H&M과 오리지널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손을 잡은 사건은 세계 패션이 디자인력보다 유통 중심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헌데 우리 디자이너 브랜드의 요즘 모습은 어떤가? 함께 힘을 합쳐도 어려운 판에 ‘서울컬렉션’과 ‘스파컬렉션’으로 나뉘어서 골 깊은 감정싸움만 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분리이고, 누구를 위한 ‘따로국밥’인가. 디자이너 브랜드로서는 이미지에 치명적인 ‘창고대방출’ 광고전단까지 뿌리며 쪽(?)을 판 상태에서 더 이상의 남아 있는 체면이 무언가. 특히 남 탓만 늘어놓거나 정작 국민 여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밀어붙이는 반쪽 대통령의 독선과 모 단체의 처세술은 너무나 닮아 보인다.
패션은 흐르는 물과 같다. 매시즌 트렌드가 있듯 패션 환경도 트렌드가 있다. 지금 우리 패션계의 트렌드는 통합 컬렉션을 통해 흩어진 디자이너들의 힘을 모아 매스티지 시장이든 아니면 중가시장이든 디자이너 브랜드 시장을 부활시켜야 할 것이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무시하던 내셔널 브랜드들이 유통 혁신을 꾀하고 글로벌 경영을 지향할 때 우리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몇 번의 해외 견본시장 참가와 컬렉션 참가로 글로벌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순진함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사실 글로벌 기준으로 볼 때 한국 패션시장은 너무 좁다. 유통 개념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간단하다. 뉴욕이나 파리나 밀라노만 일방적으로 사모할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패션시장을 만들어 ‘골목대장’이 되는 것이다. 소위 한·중·일 패션네트워크 구축만이 우리 디자이너 브랜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글로벌과 테크노라는 화두 속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고객들이나 백화점 바이어들에게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여전히 거품 많은 ‘버블껌’에 불과하다. 그 거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든 패션계의 힘과 저력이 밀집된 아시아 최대·최고의 패션위크를 열어 중국와 일본, 동남아의 바이어들로 북적거려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컬렉션의 통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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