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드림’이 한국에 만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실체는 대부분 허상이라는 의견이 팽배했지만 많은 이들이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향했다.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회복에 몰두하던 1970년대, 이민자들의 마음 속엔 미국에서라면 무엇을 하든 합당한 대가를 얻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최근 백화점으로 향하는 국내 인디 브랜드들을 보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지난해부터 빅3 백화점들은 경쟁력있는 인디 디자이너들을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기존 브랜드들이 더 이상 신선함을 주지 못하자, 인디 디자이너들을 통해 색다른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겠다는 취지에서다.
롯데백화점은 ‘패션브랜드공모전’, 신세계백화점은 ‘S-파트너’, 현대백화점은 ‘신진디자이너페어’ 등을 통해 인디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발굴하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어느새 떠들썩한 목소리는 잦아들고 백화점과 인디 디자이너들 간에 서로를 향한 비방이 난무하고 있다.
취재에 나선 기자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백화점은 백화점대로, 인디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대로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 백화점의 선발 과정에서 최종까지 오른 디자이너 박모씨. 단독 매장을 내준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고 다른 기회를 고사하고 있던 그는 남성복 ‘A’ 브랜드 안에 “숍인숍 입점하라”는 백화점의 ‘황당한’ 권유를 받았다. “애당초 약속하고 다르지 않냐”고 아무리 항변해도 백화점 관계자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만난 백화점 관계자는 “선발은 했지만 백화점에 단독 매장을 내줄 만한 스타일 수와 물량을 수용할 수 있을만한 능력있는 디자이너가 없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인디 디자이너 브랜드 대부분이 워낙 영세해 백화점 판매 시스템에 적합한 곳이 없다”고 주장했다.
양 측의 의견에 일정 부분 공감이 갔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흑백 논리로 치닫고 있는 ‘대기업-영세기업’ 프레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유통업체가 좀 더 너른 마음으로 이들을 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몇 해 전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하고, 현재 영국 패션계가 인정하는 샛별이 된 디자이너 이정선의 사례가 떠올랐다.
세인트마틴 졸업작품전에서 영국 헤롯백화점이 수여하는 최고상 ‘헤롯상’을 거머쥔 그는 헤롯백화점의 체계적인 지원을 받으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헤롯은 자신들이 선택한 이정선의 상품을 바잉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해외 바이어를 상대하는 방법, 가격 결정에 대한 조언 등 물심 양면으로 돕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헤롯’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이 자신들의 이름을 건 선택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스스로의 명예를 지켜내길 기대해본다.
김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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