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완연한 가을이다. 곱게 물든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닉네임만큼이나 높고 푸른 하늘은 화려한 단풍과 함께 가을 풍경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단풍이 드는 이유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보통 기온이 내려가면 나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떨켜층을 만드는데 떨켜층은 가지와 나뭇잎 사이에 생겨 수분 이동을 막는다. 잎은 광합성을 계속하지만 뿌리로 가지 못해 쌓인 양분이 잎을 산성화시켜 엽록소를 파괴하면 가려져 있던 붉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단풍이다.
즉 안토시아닌은 강렬한 가을 자외선을 차단하는 ‘선크림’ 역할을 하는데 이 색소가 없으면 나뭇잎이 약해져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양분을 뿌리로 보내지 못한다.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의 비밀 병기인 셈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안토시아닌은 갑작스러운 추위에 나뭇잎 세포가 얼지 않게 하는 ‘부동액’ 역할을 하고, 열매 주위에 해충이 꼬이는 것을 막아주는 ‘구충제’ 역할도 한다. 또한 붉은 색을 싫어하는 진딧물의 접근을 막아주고, 잎이 땅에 떨어졌을 때 독소를 내뿜어 경쟁관계에 있는 주변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 결국 화려한 단풍은 몸치장이 아니라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인 셈이다.
패션의 겉모습도 단풍처럼 화려하다. 어쩌면 그 화려함에 매혹되어 패션계에 발을 디디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입학한 패션 특성화고의 학생들은 졸업 후 학교측 취업률 올리기 작전 때문에 꿈을 버리고 공장으로 취직을 하고, 운 좋게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태반이 이태백이 되어 만년 인턴으로 전전한다. 신진 디자이너들은 비싼 임대료 때문에 매장은 엄두도 못 내고 판로가 없어 채 꽃이 피기도 전에 사그라진다. 기성 디자이너들 조차 백화점과 편집매장에서 죽기 살기의 경쟁을 벌인다. 이제는 세계화로 인해 국내 브랜드뿐 아니라 글로벌 브랜드와도 경쟁해야 한다.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의 훈훈했던 선후배간의 동업자 정신도 불황으로 인해 꽁꽁 얼어 붙은 지 오래다.
봄은 꽃과 다투고 여름은 태풍과 싸우지만 가을은 다투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혼신의 불꽃을 태워 나뭇잎으로 내려놓고 나목이 되어 홀로 겨울을 난다. 갑을 관계가 뚜렷한 백화점 유통과 수입 고가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패션 사대주의가 팽배한 대한민국 패션에서 단풍과 같은 열정과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앙상한 나목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되면 다시 생명의 싹을 틔우듯이 대한민국 패션도 기승전결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그 스토리는 디자이너들의 몫이다. 오는 22일부터 많은 신구 디자이너들이 한 자리에 모여 화려한 서울컬렉션을 선보인다. 이번에는 단풍처럼 스스로를 불태우자.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패션(High-end Fashion)을 살리겠다는 희생정신과 동업자 정신으로 패션(Passion)을 불태운다면 낙엽으로 인해 자양분을 축적해 다가올 K-패션의 봄날, 새로운 가능성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유재부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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