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구에서 열린 ‘영 제너레이션 라이프스타일 쇼(?)’라는 다소 생뚱맞은 컬렉션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원대연 한국패션협회 회장은, “패션은 고부가가치 패션산업이자 문화산업인 만큼 한국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시장에서 승부해야 한다”는 취지의 축사를 했다. 쇼가 진행되는 내내 ‘한국적’이라는 화두가 뇌를 괴롭혔다. 쇼 중간에 언뜻언뜻 비치는 국가행사 도우미 유니폼(?) 같은 의상들을 보면서 마치 ‘악성 종양’과 같은 이 빛 바랜 화두를 금방이라도 터트리고 싶었다.
세계 패션에 있어 ‘한국적’이라는 개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섬유수출대국이었던 우리나라지만 그 뒤안길에는 OEM 수출국이라는 그늘이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누이들의 저임금 덕분에 싸고 질 좋은 물건을 만든다는 코리아의 명성(?)이 전세계에 알려져, 비록 ‘주문자상표부착’이었지만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의 반도체나 자동차처럼 말이다.
1970년대 OEM 방식의 우리 섬유산업이 노동집약산업이었다면 문화산업으로 변해가는 21세기의 고부가가치 패션은 시스템과 사람 중심의 지식집약산업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화점이나 전문점에 옷을 직접 파는 바잉 시스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인력들이 어떻게 외국 바이어와 수출 상담을 한단 말인가. 바이어에게 외국에 나가서 수입해 오는 교육을 시키면서도 정작 밖에 나가서 우리 패션 제품을 파는 교육을 시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패션큐레이터나 패션행정가, 프레스 에이전시 등과 같은 전문적인 인재 육성 없이 건물만 지으면 그것이 고부가가치 패션의 완성인가.
‘한국적인’을 외치는 패션계 인사와 디자이너, 교수들은 많다. 하지만 실체를 물어보면 대부분 너무 추상적이거나 비상업적이다. 만일 ‘한국적인 패션만이 세계적으로 성공한다’는 논리라면 아프리카 풍 에스닉이 주도하는 내년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패션 강국으로 부상해야 할 것이다. 유명 컬렉션의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 이들 패션 시티 밖에 있다. 이슬람 건축의 격자무늬 장식, 공단이 많이 섞인 중국 전통 의상, 검붉은 인도의 토양, 아프리카의 원시 자연 등 20세기 패션을 주도해 온 디자이너들은 하나같이 이국적인 문화에서 디자인 단서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패션은 세계 6대 컬렉션 진입을 이야기했다.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동경에 이어 우리나라가 ‘넘버 식스’라는 것이다. 참 발칙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제자리걸음을 하며 그 20년을 흘려보내는 사이 제3세계 패션 국가였던 스페인, 스웨덴, 벨기에, 독일, 호주, 세네갈, 상파울루 등이 급부상한 것은 모르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최근 유럽 패션의 변방이었던 스웨덴과 스페인이 소위 ‘뜨고’ 있다. 시대정신이라 불리는 ‘매스밸류마켓’과 ‘맥패션’이 패션 시장을 디자이너 중심에서 유통 중심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1970년에 탄생한 스웨덴의 「H&M」, 1975년에 런칭한 스페인의 「자라」가 1969년에 탄생한 미국의 「갭」과 함께 세계 3대 리딩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고, 그 뒤를 스페인의 「망고」가 발빠르게 좇고 있다.
비록 랄프 로렌, 존 갈리아노, 조르지오 아르마니, 코코 샤넬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는 배출하지 못했지만 세계 패션의 ‘정글싸움’에서 정면 공격을 피해가며 가치 중심의 틈새시장을 공략한 이 두 나라는 그들만의 시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절대적인 볼륨, 선기획 생산, 합리적 가격’이라는 화두를 들고 말이다. 얼마 전 자신이 디자인하고 있는 「샤넬」을 무단 카피한다고 「H&M」을 비난했던 칼 라거펠트조차 「H&M」과 손잡았고, 여기에 「망고」의 톰 포드 영입설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제 SPA형 브랜드의 파워는 명품 하우스 LVMH와 구찌 그룹의 파워를 능가할 태세다.
이제 우리도 군사정권 시절의 산물인 ‘한국적’이라는 악성 종양을 터트리고 시대정신에 맞는, 세계인을 위한 우리 브랜드를 만들자. 중국 대륙과 해양국 일본을 양옆에 끼고 있고, 여기에 한류를 등에 업은 우리가 어쩌면 제2의 「자라」나 「H&M」을 만들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수입 브랜드 도입에만 열 올리는 대기업과는 달리 최근 중국 진출과 유통업 진출을 통해 토종 패션 그룹으로서 위상을 차근차근 다져가는 이랜드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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