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랜 친구 둘과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인 일이 있다. 한 친구는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해 꽤 잘나가는 섬유수출회사에 취직했다가 30대 초반에 명예퇴직 당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동대문시장에서 의류도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권세는 없지만 요즘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업체라고 할 만큼 크지는 못하지만 약간의 재산도 모았고 형제들과 주변을 돌보면서 산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술을 마시고 주변의 애경사에 원근을 마다하고 찾아갈 여유가 있다. 매일 사우나를 즐기고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한다. 일상도 바쁘지 않다.
또 한 친구는 국내 굴지의 대형 백화점에 20여년간 근무하다 지난해 초에 사직했다. 일년여 동안 백화점 근무 전력을 이용해 여러 업체에서 허울좋은 이사 직함을 몇 번 받았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사는 것이 한숨으로 얼룩져 있다. 수입은 없고 가는 직장마다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데 회의감을 느낀다. 그가 이 난감한 지경을 벗어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쪽은 일찍 매(?)를 맞고 나와서 갖은 고초 끝에 새 삶의 여유를 찾았고 한쪽은 긴 시간 동안 사회의 노란자위 자리(?)를 맘껏 향유하다 뒤늦게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옛말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아량을 베풀고 남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에서 매사를 처리하기 쉽다.
때문에 상대방에게 때로 깊은 상처를 주기도하고 실제로 큰 피해를 주면서 자신은 아무런 마음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경우 그 위치를 과시하거나 우월성을 누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돌아보면 자신이 가진 권세나 우월감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모른다. 지난 연말 모 백화점에서는 다수의 중간 간부들이 강제퇴직을 당했다.
본인들에겐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백화점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백화점과 거래하는 협력업체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대부분 그 동안 바이어로서 협력업체에 아량과 이해보다는 권한 행사에 충실한 ‘권력자’로 군림한 면이 있다. 아쉽게도 그 권력자들의 군림이 대부분 40대 중반에 꺾였다. 평균연령 100세 시대를 앞둔 지금 40대 중반의 나이는 사회에서 내몰리기에 너무 젊다. 이제 그들 중 상당수는 10평 안팍의 작은 사무실에서 창업을 하거나 작은 개인 사업체에 일하면서 백화점의 높은 벽을 바라보는 입장이 될 것이다.
패션업계 근무자의 해고는 일상사다. 그래서 오늘의 ‘권력자’가 내일은 ‘굽신 거리는 신분’이 되기 일쑤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필자는 10여년 간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했다. 사회부 현장 기자로 활동했고 그 어렵다는 국회 출입 정치부 기자로 다년간 국회를 출입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다음의 ‘제4부’라 할 정도로 무소불위 권력이라는 언론의 중심에
섰던 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남에게 좀체 고개 숙일 일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가업인 패션업에 뛰어들면서 백화점 바이어에겐 절대적 약자 입장에 섰다. 언론사 기자 출신 영업맨에 대한 편견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노출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숨죽여 지내야 했다. 그리고는 계장이나 주임급의 젊은 바이어들에게도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다.
반대로 우리의 거래 협력사인 원부자재업체나 프로모션업체에 대해서는 군림하는 자세를 가졌을 것이다.
우리회사의 이월 상품을 거래하던 업체의 사장과 마주했을 때 그 사장은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월상품을 판매하던 사장이 우리 사업체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으니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또 당시 회사에 제품을 납품하던 작은 프로모션 회사에 나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새로운 재기를 꿈꾸고 있으니 이 또한 운명의 신묘한 조화라 해야 할지.
우리는 아직 상업주의에 완숙하지 못하고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 과거 전통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상대를 업신 여기고 자신의 강자적 위치를 너무 내세운다. 신분의 변화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끝없이 나를 낮추고 타인을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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