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하나.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의 추억이다. 당시 의상학과에 다니던 필자는 졸업논문 대신 창작 의상을 만들어 소위 ‘졸작(졸업작품전)’이라 불리는 패션쇼를 해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에겐 남다른 고민이 하나 생겼다. 여성복을 전공했던 필자는 패션쇼에서 내가 만든 옷을 입어줄 여자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남자였던 필자는 재학중에도 과제를 위해 동기나 후배 여자아이들의 몸을 빌려야 했다. 그래서 늘 새로운 과제 때마다 소위 피팅되는 동기나 후배들을 좇아다니며 소위 몸동냥(?)을 했다. 그만큼 남자인 필자는 옷 만드는 것보다 피팅 모델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덕분에 소위 피팅이 되는 동기나 후배들은 남학생들에게 요즘 말로 인기 짱이었다. 어쨌든 4년 내내 나에게 몸을 빌려주었던 동기들은 자신이 직접 모델로 서야 했고, 그나마 피팅이 되는 후배들은 다른 남자 동기들이 섭외를 끝낸 상태였다. 결국 뒤늦게 서울 시내 캠퍼스를 뒤져가며 몸매가 되는 모델을 찾다가 간신히 3명을 헌팅해 무사히 졸작을 끝냈다.
기억 둘. 당시 졸업작품 패션쇼는 학교 실내 체육관에서 열렸다. 요즘에야 돈을 갹출하거나 스폰서를 구해 전문 모델에, 근사한 무대 장치와 조명으로 여느 기성 패션쇼 못지않은 졸업패션쇼를 선보인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모델은 옷을 만든 사람이 직접 서고, 무대는 후배 남학생들이 밤새도록 뚝딱거려서 만들었다. 몇 번의 무너짐과 다시 세움이 반복되고 난 새벽녘에야 비로소 허름하고 아슬아슬한(?) 무대는 완성되었다.
졸업작품 발표회 날. 가족친지와 학우들이 보는 가운데 쇼는 무사히 막을 올렸다. 그런데 쇼가 진행되던 도중 동기 중 좀 뚱뚱한 친구가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나와 무대 위에서 워킹을 하자 체육관 여기저기에서는 구경 온 타 학과 남학생들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의 얼굴은 분장용 마스카라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몸이 안 되는 여학생들이 직접 무대에 오르는 헤프닝은 사라졌다.
현실 하나. 최근 보건복지부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외모 중시 신드롬이 10대 소녀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 ‘외모지상주의 인식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 물론 개인적 관심사인 외모에까지 정부가 관여한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이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것이어서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아 실현의 한 방편으로 외모를 가꾸고 이를 통해 잃었던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노력 또한 나쁘다고만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외모를 착한 품성이나 탁월한 실력 등 다른 인간 조건보다 우선시해, 무조건 외모 업그레이드에만 매달리는 병적인 성형 열풍이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성형 열풍에 대해 BBC는 “코리아, 외모에 미친 나라, 성형수술을 당연시하는 나라”로 소개했고, 일본 방송은 “한국 여대생의 52%가 성형수술을 받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여기에 지나친 성형수술과 짙은 화장으로 대학 강의실에서조차 여학생의 출석 확인이 어려울 정도라고 하니, 우리의 ‘외모지상주의’는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하지만 ‘외모주의 인식개선 프로그램’을 만들어 초중고 여학생들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신감을 갖게 한다’는 복지부 구상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사회 분위기와 인식의 변화다. 디자이너가 아닌 모델을 원하는 기존 패션계의 잘못된 ‘관행은 그대로 둔 채,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가진 고3 여학생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꿈을 가지라’며 ‘외모주의 인식개선 프로그램’만을 주입한다면 그 아이는 과연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현실 둘. 최근 후배들을 만나게 되면 ‘청년실업시대’라 자연히 취업으로 화제가 옮겨간다. 그러면 대부분의 후배들은 “피팅이 안 되어 디자이너는 포기했다”는 말들을 한다. 비밀리에 성행했던 소위 ‘피팅되는 디자이너 뽑기’가 이제는 하나의 공식이 된 듯하다. “디자이너를 뽑는 것이지 모델을 뽑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에 업체는 “자신이 만든 옷을 입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옷을 디자인할 수 있나요?”라고 말한다. 결국 실력이 좋아도 몸매가 안 되면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이런 가운데 색다른 패션쇼가 눈길을 끈다. 오는 4월 9일 열리는 미즈 빅 우먼들의 패션쇼가 그것이다. 허리둘레 34인치를 뜻하는 88사이즈부터 130 사이즈를 입는 여성들, 즉 미즈 빅 우먼들은 44, 55, 66 사이즈로 대표되는 여성복 시장에서 잊혀진 지 이미 오래다. 그녀들이 패션 모델로 화려하게 변신해 ‘아름다움의 기준’을 바꾸자고 외친다. ‘패션 모델은 키 크고 날씬해야 한다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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