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 대한 기억은 어렸을 때의 이런 저런 추억과 뒤섞여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그 때 내 나이 6살이었으니 아련할 수 밖에…
그러나 어떤 기억들은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것도 있다.
집집마다 울타리에 개구멍(옆집과 사이에 있는 울타리에 구멍을 뚫어 개가 지나 다님)을 뚫어 놓고 여차하면 옆집 개구멍을 통해 동네 밖까지 피난 하던 일, 동네 뒷산에서 밤새 총소리가 나면 까만 색에 빨간 깃을 덧대어 만든 무명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던 일,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 자매가 한 이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자면 두려움보다 장난끼가 동해 발길질하며 킥킥대다 꾸중 듣던 일, 국방색에 빨간 어깨장식이 있는 군복차림의 인민군이 날아다니는 총알을 피해 우리 집 대문 뒤에 숨어있던 일, 한길에 나가면 시체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던 일, 그리고 언니 오빠를 따라다니며 메뚜기 잡던 즐거웠던 피난생활 등…
나처럼 6.25를 경험했거나 안 했거나 나이든 사람에게는 6.25와 관련된 그림이 있다. 흰 무명옷을 입고 머리와 손에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 휩쓸리는 인파 속에서 놀라 우는 어린아이의 커다란 눈망울.
그러나 이 6.25가 우리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더구나 의생활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십자군 원정이 서양인의 의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6.25라는 전쟁도 우리에게 다른 지역의 의생활 문화를 접하게 했던 것이다.
한 여름에 시작된 전쟁이 겨울까지 이어지면서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에게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구호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탕, 초콜릿, 비스킷, 껌. 그리고 깡통에 든 각종 음식에서부터 스커트, 바지, 블라우스, 원피스, 스웨터, 각종 외투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의 옷들이 추워 떠는 피난민들을 먹이고 입혔다. 이렇게 하여 서양의 옷과 한걸음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양복이 이 땅에 들어온 역사는 그보다 길다.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양장 여인은 윤치호의 아내 윤고라(실명 김고라)로 그 착용 연도가 1899년으로 되어 있다.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의 권유로 양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신교육을 받은 소위 신여성들이 뒤이어 양장을 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곤 하였지만 양장이 유행으로 정착하기 이전에 6.25라는 전쟁을 맞이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재기의 몸부림을 칠 때 사람들은 합리적인 생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어디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생활 복으로서 우리 옷의 불편한 점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피난시절 요긴하게 입어봤던 양복의 편리함에 대한 경험이 한 몫을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저렇게 한복을 개량 해보기 시작하였다. 그 옷은 한복도 양장도 아니었다. 결국 활동복으로는 서양 복을, 의례시나 파티복으로 전통 한복을 입자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활동 현장에서 한복이 자취를 감추고 양복으로 대체되어갔다. 옷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6.25가 의생활 혁명을 일으켰다”라고.<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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