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 외교, 옷 그리고 촛불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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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견 칼럼

2008-06-16 오전 8:23:32

촛불 시위로 나라가 시끄럽다. 쇠고기 협상이 잘못되었단다. 나날이 촛불 시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부의 외교 활동에 불만이 있나 보다. 명분이야 광우병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명도 광우병으로 생명을 잃은 예가 없다 하니 그도 이 난리의 핵심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혹 균등한 외교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분노의 시작은 아닐지. 그 답이 무엇인지는 내가 꼭 풀어야 할 과제는 아닌 듯싶다. 난 다만 옷이 외교에 큰 역할을 했던 지난 일을 이야기 하고 싶을 뿐이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던, 예나 지금이나 국익을 위해 주변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다. 개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나라와 나라가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증거를 남겨 그들간의 약속을 확실히 한다. 종이에 쓰고 사인을 하고 그것을 보관 하는 것으로 약속을 보장 받으려 하는 것이 오늘의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좀 달랐다. 외교관계가 맺어진 증표로 옷을 주고 받았다. 서로 교환 한 것이 아니라 상위 나라에서 하위 나라의 왕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관복을 하사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사여가 있었던 것은 신라 진덕여왕 2년이었다. 그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무력 침입에 시달리던 중으로 김춘추가 당나라와 청병을 통한 외교관계를 맺고 당 태종에게 관복을 받아왔다. 당에서 먼저 외교관계를 맺자고 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주종 관계 맺기를 자처하고 그 증표로 옷을 청하여 받아 왔다 하여 청사관복(請賜冠服)이란 표현을 쓴다. 이 청사관복제도는 이 때를 시작으로 조선 500년 동안 계속되며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확인하곤 하였다. 중국은 관복을 사여 할 때 일정한 원칙에 따랐다.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이었다. 우리나라의 왕은 중국의 황제, 황태자 다음 서열인 친왕 예에 준했고, 우리나라 1품은 중국의 3품에 해당하는 이른바 두 등급 아래 관리의 옷을 받았다는 것이다. 옷이 재화로 가치가 있을 만큼 귀해서였을까? 아니면 언제 어느 때이고 몸에 걸치고 있어야만 하므로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두 나라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찌 되었던 고대의 외교관계는 이 옷으로 확실히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양국이 어찌하다 옷을 주고 받는 일이 몇 십 년 건너 뛸 수도 있어, 이럴 때면 우리 왕실에서는 다 해진 사여복을 입기도 했고, 이 나라 왕의 사이즈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옷이 보내져 왔으므로 어떤 왕은 너무 큰 옷을 황은(?)이 감할까 봐 고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착용한 웃지 못할 예도 있었다. 몇 번씩 옷을 청하여 받게 되면 그 은혜가 감사해 사은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가 이 같은 역사를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 다 힘이 없어 빚어진 일이었다. 오늘의 외교는 어떨까? 경제가 성장하고 무엇보다 교육 수준이 높아 알 것을 다 아는 우리 국민들이 혹시 잘못된 외교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촛불 시위는 아닌지.

송명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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