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침대에서 백조 인형을 안고 악몽에 시달리는 어린 왕자. 창가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백조는 깃털 바지만 걸친 근육질 남성. 잠에서 깬 왕자는 침실로 들어온 어머니인 여왕이 안아주길 바라지만 여왕은 거부한다. 그녀는 왕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더 강한 남자가 되거라.’
얼마 전에 관람한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이다. 만약 이 뮤지컬에서 마법에 걸려 밤에만 백조로 변하는 공주 오데트와 지그프리트 왕자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고전 발레를 연상했다면 그 기대는 온데간데 없고 남은 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뿐이다.
남성 백조들로 유명한 이 댄스 뮤지컬은 여름마다 한국에서‘마법’을 부린다. 그 비결은 바로 ‘동성애’ 코드다. 안무가이자 연출가 매튜 본은 동성애자고, 무용수들도 절반 이상이 게이다.
<백조의 호수>에서는 왕자와 여왕, 왕자의 여자 친구가 공연장을 찾아 여장 남자 무용수들이 펼치는 우스꽝스런 공연을 펼친다. 또 왕자가 런던 뒷골목의 클럽을 돌아다닌다. 여장 남자 무용수나 런던 뒷골목 클럽은 고전 발레의 틀을 무참히 깨버린다. 여기에 핸드폰까지 등장하니… 클럽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쓰러진 왕자 앞에 나타난 남성 백조들의 춤은 크고 역동적이다. 날갯 죽지와 머리로 왕자를 공격할 땐 난폭하기까지 하다. 땀이 흥건한 남성 백조들의 몸이 조명에 반사될 때 관객들은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묘한 흥분을 느끼게 만든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근육질 남성 무용수의 몸을 백조의 몸짓으로 형상화해 ‘백조=여성’이라는 이성애자의 선입견을 사정없이 날려버렸다. 이는 게이 공동체의 ‘자웅동체’ 신화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보통 예술가의 성 정체성이 그가 하는 예술의 질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매튜 본이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가 백조를 닮은 낯선 남자에게 거절 당하는 대목에서 그림자들까지 춤으로 표현할 땐 아픔이 느껴진다. <백조의 호수>의 동성애 코드와 관련된 질문에 매튜 본은 늘 같은 말을 한다. “그 작품은 사랑 받지 못하는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기자는 패션계에서 15년 동안 취재를 하며 수많은 남자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 중에는 호모라고 커밍아웃하는 경우도 있고 호모로 추정되는 단서(?)가 있는 디자이너도 있고, 반면 세상 소문과 달리 호모 쪽 코드와는 전혀 다른 이들도 있었다.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어려서부터 왈가닥이니 왈패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고 선머슴아 같은 행동 때문에 다수의 여성들이 그를 추앙했다.
고교 졸업 후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4학년 때 여군이 되기로 하고 현재 여군이 되어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보통 여자와는 다른 길을 가고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자들과 동등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느 남자 군인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여자다. 미소가 매력적인…
한 남자가 있다. 어려서부터 인형에 옷을 오려서 입히길 좋아했다. 그리고 천조각 모으기를 즐겼다. 내성적인 그는 대학을 의상학과로 지원을 했다. 머리도 기르고 귀도 뚫었다. 여자 동기들과 어울리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여자였다. 섬세한 손 짓과 미소, 말투까지… 어느새 그 사내아이는 다수인 여자들 숲에서 부드러운 여성의 기운을 많이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남자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인간에게는 여성 호르몬과 남성 호르몬이 동시에 흐른다. 이는 결국 누구나 이중적인 성격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복을 디자인하는 남자 디자이너의 경우, 남성복 디자이너 보다는 더 섬세하고 여성적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고객이 대부분 여성이라면 그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말투로 응대해야 한다.
술자리에서 늘 나에게 같은 질문을 20년째 하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남자 패션 디자이너는 모두 호모라는 선입견을 버려!” 물론 커밍아웃한 디자이너들도 있을 것이다. 단지 양성애자이기 때문에 노출이 안될 뿐 직업상 몸 안에 충만된 여성 호르몬을 어쩌랴.
현재까지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호모 디자이너의 대명사가 된 디자이너 앙드레김은 자신이 결혼을 안 한 이유에 대해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나의 고객인 여자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나만의 여자를 포기했다. 나만의 여자를 포기하는 대신 난 많은 여성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라고 말했다.
고객의 사랑을 먹고 사는 디자이너에게 단골은 손님 이상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수다로 함께 푸는 이들은 서로에게 솔메이트인 셈이다. 남자 디자이너가 좋다. 그들의 섬세한 예술혼이 부럽다. 또한 자유로운 영혼과 쿨한 처세술이 좋다. 난 그들이 호모든 아니든 상관 없다. 그들은 나에게 늘 친구였으니까.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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