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대표적인 캐주얼업체는 협력업체 간담회를 통해 ‘강력한 거래기준’을 밝혔다. 가격경쟁이 심화되고, 소비자들의 입맛도 까다로운 만큼 품질과 가격, 납기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춰야만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납기를 어기면 클레임 처리하겠으며, 경쟁사보다도 비싸면 언제라도 거래선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간담회에 참가했던 업체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초기에는 나중에 잘 되면 물량을 밀어줄 테니 손해가 나더라도 밀어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본인들의 잣대에 미치지 못하면 언제라도 내치겠다고 하니 어떻게 거래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가격과 품질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신뢰가 기본인데 ‘을’에 대한 잣대는 엄격한 데 비해 ‘갑’에 대한 잣대는 없다는 것이 업체들의 평이었다.
최근 한 대기업의 소싱 책임자는 협력업체 미팅을 통해 “신임 대표이사가 원가를 20% 줄여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봉제 공임에서 10%, 원단 값에서 10%를 줄여야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원가절감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국내 굴지의 대기업 경영자가 그렇게까지 지시했겠느냐는 것이 업체들의 의문이었다. 설령 그런 지시가 있었더라도 협력업체와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찾든지, 심도 깊은 자구책을 통해 원가를 절감해야지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것처럼 일 처리를 해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최근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말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이에 대기업들은 선심을 쓰듯 현금거래와 기술이전 등을 쏟아내고 있다. 섬유·패션산업은 90% 이상이 중소기업이 차지할 만큼 전형적인 중소기업 전문 업종이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자금과 기술 모든 측면에서 넉넉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더를 발주하는 원청 업체의 잣대가 명확해야 한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마진이 적더라도 브랜드가 성장하면 덕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 정확한 납기를 바란다면 일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는 기한이 있어야 한다. 디자이너는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며 시간을 끌면서, 납기가 늦었다고 마켓 클레임을 치면 어떤 업체가 다시 거래하려고 하겠는가?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원청 업체의 잣대부터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중소기업, 아니 나아가 섬유·패션업체들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갑-을’에 대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모든 잘못을 을의 잘못으로 몰아붙여서는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갑과 을을 정해놓고 서로 책임을 미루고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소비자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소비자가 인정하는 상품을 만들기 위한 ‘갑-을 관계’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상대방에게 엄격히 들이대기 이전에 나 자신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잣대를 만들어야 한다. 갑의 실력은 원가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아닌, 얼마나 사고가 나지 않는 환경을 만들 수 있느냐에 있다.
정인기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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