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벨' 2016 S/S 룩북 |
“해외 시장 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아요.”
최근 만나는 홀세일 브랜드의 대표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해외 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 생존할 방법이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는 상품을 팔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신진 디자이너 붐’을 타고 우후죽순 생겨났던 셀렉트숍 상당수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접근성이 높았던 온라인 편집숍 마저도 ‘브랜드 인큐베이팅’이라는 미명하에 판매 수수료를 대폭 인상했다.
몇 안되는 유통망에서 살아남으려니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앞다퉈 가격을 낮추다보니 퀄리티는 떨어졌다. 잘 팔리는 디자인이 등장하면 너도나도 비슷하게 내놓는 통에 브랜드 가치도 무너졌다. 늘어난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유통망을 무분별하게 넓히면서 소규모의 편집숍들이 차별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됐고, 이들이 결국 사업을 포기하면서 홀세일 브랜드의 판로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매출이 잘나든 안나든 홀세일 브랜드라면 해외시장을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됐다. 때마침 패션업계에는 ‘지금이 해외시장 진출에는 적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류 열풍으로 인해 세계 속에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호응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국내 브랜드를 유치하기 위해 방한하는 셀렉트숍 및 온라인몰 바이어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홀세일 브랜드들 또한 직접 해외 전시회에 나가거나 컬렉션을 선보이는 등 해외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소수에 한정된다. 해외 비즈니스에 대한 준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셀렉트숍 ‘키클루’의 김형록 대표는 “홀세일 브랜드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2~3년차 신진 디자이너의 경우 콘텐츠 제작에 비해 비즈니스에 대한 전문성이 결여돼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예를 들어 브랜드에 맞는 타깃층은 누구인지, 어떤 시즌에 어떤 아이템을 전략적으로 밀어야하는지, 생산단가는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브랜드는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김 대표는 수시로 세미나를 열어 홀세일 브랜드들이 국내는 물론 해외 마켓 공략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 생존 모델을 구축하라
그런가 하면 각고의 노력으로 체질개선에 성공해 국내외 바이어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브랜드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앤더슨벨’이다. ‘앤더슨벨’은 지난해 이른바 대박행진을 이어가며 홀세일 마켓을 뒤흔들어놨다. 맨투맨을 히트시키며 스타일당 1만장씩 팔아제끼더니 겨울에는 코트로 호조를 보였다.
중국 온라인몰 ‘슈핀닷컴’에서도 ‘앤더슨벨’을 바잉해간 뒤 반응이 좋자 올해 수주 물량을 3배로 확대했다. 이러한 뜨거운 반응의 배경에는 스칸디나비아라는 이국적인 콘셉과 톱모델을 내세운 룩북, 그리고 가격대비 뛰어난 품질이 있다.
최정희 ‘앤더슨벨’ 상무는 “‘앤더슨벨’은 제조원가와 소비자가는 다른 브랜드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원단 퀄리티가 월등하게 뛰어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높아 재구매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최 상무는 퀄리티 구현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다. 좋은 품질의 원단을 확보하기 위해 한 시즌 앞서 비수기에 원단을 직접 직조하는 것이다. ‘앤더슨벨’은 최소 1000장의 원단 재고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리오더에도 즉각 대처할 수 있다.
‘M’ 디자이너 브랜드는 생산과 영업을 분리시킴으로써 효율을 증대시키고 있다. 생산과 영업 등을 전문업체에 맡기고 디자이너는 디자인과 기획에 더욱 몰두하는 것이다. 이 브랜드는 론칭 초기부터 중국 생산을 이어왔다. 이를 위해 기획도 서둘러 진행한다. S/S 컬렉션의 경우 10월이면 생산을 시작해 1월이면 해외 편집숍에 납품할 수 있도록 한다.
국내 유통망에서도 다른 브랜드에 비해 개시가 빠르기 때문에 바이어들의 호응이 높다. 안정적인 납품 시스템 덕분에 유통사와의 전략적인 프로모션도 자주 진행하는 편이다. 또한 해외 영업을 에이전시에 일임한 뒤로는 세계 각국의 빅바이어들과 거래할 수 있게 됐다.
◇ 소비자는 브랜드의 가치를 산다
글로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키워드는 뭘까? 유통 전문가들은 브랜드의 스토리, 즉 가치라고 말한다. 패션업계에 독창적인 디자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됐다. 프랑스 파리에서 컬렉션이 열렸다 하면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2주만에 카피 제품들을 줄줄이 내놓는다. 이에 컬렉션을 아예 포기하는 하우스 브랜드들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스토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브랜드만이 가질 수 있는 배경과 아카이브에 소비자들은 찬사를 보낸다. ‘탐스’와 ‘아크네 스튜디오’도 독자적인 브랜드 스토리를 바탕으로 글로벌하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국내에도 스토리로 주목받고 있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젠틀몬스터’. 이 브랜드는 매 시즌 확고한 콘셉 아래 관련 퍼포먼스와 전시를 통해 이미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지난 3월에 선보인 2016 S/S 컬렉션에서는 ‘도살자’를 모티브로 메탈릭 레드를 재해석한 제품들을 공개했다. 정육점을 연상케하는 무대에서는 모델들이 고기를 써는 듯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한편 피날레에서는 하얀 가죽을 다듬던 도살자가 새빨간 피를 뒤집어 쓰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젠틀몬스터’는 쇼룸에서도 같은 내용의 전시물이 설치돼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유통 전략 또한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만 한다. 브랜드의 콘셉과 아이덴티티를 잘 부각시켜줄 수 있는 유통망을 선별해 전개하는 것이 롱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셀렉트숍 ‘무브먼트’의 이승현 대표는 “지난 2012년 등번호가 새겨진 티셔츠로 패션계에 센셔이셔널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레스아티스트’는 전략적인 유통망 전개 전략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높였다.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꼴레뜨’, 영국의 ‘하비니콜스’, 온라인 셀렉트숍 ‘하이프비스트’ 등 브랜드 가치를 제대로 표현해 줄 수 있고, 패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소비자들이 애용하는 유통망만을 선별해 유지함으로써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세컨드 비즈니스를 고려하라
그렇지만 해외 시장 진출이 절대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다수의 브랜드들이 매출 증대를 바라고 해외 시장에 뛰어들지만 오히려 수익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해외 전시회에 참가한다고 해도 첫 시즌부터 실질적인 수주가 성사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해외 바이어들은 해당 브랜드에 관심이 가더라도 여러 시즌 지켜보며 안정적인 거래처가 될 수 있는지를 타진해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3~5년간은 투자 기간으로 봐야만 한다. 또 해외 시장에 진출 시 해당 국가에 맞춘 마케팅을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200억~300억원의 투자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쇼룸 ‘더 써드 뷰’의 송승렬 이사는 ‘향후 1~2년 내에 디자인 콘텐츠 비즈니스가 활성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제공하면 바이어들이 이를 선택해 판매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디자이너 1명이 기획-생산-영업-유통까지 모두 처리해야하는 구조적인 어려움에서 탈피할 수 있다.
‘더 써드 뷰’는 현재 이 모델을 테스트 중이다. 디자이너 1명당 1주일에 3개씩 디자인을 제시하고 바이어는 이 중 원하는 디자인을 수주한다. 이를 통해 디자이너는 풀 컬렉션을 해야한다는 부담없이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월 평균 200~300만원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송 이사는 “디렉터의 가치를 비즈니스화 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실제로 많은 수의 디자이너들이 중국 등의 패션 기업에 고용되고 있으며, 이들 한 명이 벌어들이는 외화 가치는 소규모 브랜드의 수주량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원단을 직조해 퀄리티를 높인 '앤더슨벨' |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세계 속에 뻗어나가는 '젠틀몬스터' |
'젠틀몬스터' 2016 S/S 컬렉션 한 장면 |
최은시내 기자
cesn@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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