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류/소재 수입업체·해외 생산업체 직격탄
악재 첩첩산중 대응 늦으면 빙하기 닥칠수도
10월 13일 하락세 반전에 성공하며 안정세를 되찾던 환율이 15일 실물 경기가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돌면서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 16일에는 11년 만에 가장 높은 폭인 133원이나 폭등하면서 1373원에 마감했다. 코스피 시장도 역대 최대 하락폭인 126.5p 떨어지며 1213.78로 장을 마쳤다.
환율이 연일 급등락을 반복하면서 전세계 시장에 혼란을 가져온 것을 물론이거니와, 국내 시장에도 직격탄으로 작용했다. 특히 해외 생산 및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내 패션업계는 소비침체라는 악재와 맞물려 ‘IMF 때 보다 더하다’는 자조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위기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지난 1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9월 수출입 물가 동향에 따르면 준내구재로 분류되는 의류제품은 바지 9.4%, 셔츠 10.8%, 재킷 11.2%, 스웨터 8.5%, 스포츠신발 10.1% 등 전월대비 평균 10% 수입 가격이 상승했다. 전년 동월대비는 약 30% 이상 올랐다. 원화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이다. 꼭 이러한 지표를 예로 들지 않아도 최근 들어 환율 급등에 따른 문제점이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생산 협력업체들이 오더를 받고도 제품 납품을 포기하고, 수입 업체들은 결제를 미루고, 수출 업체 들은 이미 불거진 키코 관련 손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수입 브랜드 업체 ‘죽을 맛’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곳은 의류 수입 업체들이다. 백화점 위주로 10여개 매장을 전개하고 있는 모 수입업체 사장은 최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5월 발주한 가을 상품 대금 결제가 코앞인데, 발주할 당시보다 환율이 30% 이상 올라 차액만 무려 5억원이 넘기 때문이다. 가을장사를 잘해봐야 5억원을 남길까 말까 한 상황인데 환차손으로만 그 이상을 날렸으니 사업을 지속할 의지가 시들해진 것이다.
이 업체 사장은 “가뜩이나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있는 데 환율이 올랐다고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환율 추세가 겨울 상품 결제 때까지 이어진다면 우리 같은 영세 수입업체 가운데 상당 수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기업이라고 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입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은 환율이 안정 국면에 들어설 때까지 입고일을 최대한 늦춘다는 계획이다. 어쩔 수 없이 가을 신상품의 소비자 가격도 20% 가량 인상했지만 단기 대응책일 뿐 환율이 이 상태를 유지한다면 사업 구조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회사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완제품 수입 업체뿐만 아니라 수입 소재의 비중이 높은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코오롱스포츠」의 경우 내년 봄ㆍ여름 시즌 상품에 사용하기 위해 발주 했던 원단의 20% 가량을 일단 홀딩시켰다. 환율 추이를 살펴가며 대응하기 위해서다. 고환율이 이어진다면 상당량은 국내 소재로 대체할 계획이다. 기존처럼 수입소재를 사용해서는 판매가격 인상이 불가피한데, 원가가 상승했다고 무조건 소비자가에 반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수입 원단 가격은 국제 시세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절이 불가능하지만 국산 원단, 부자재와 봉제 등에서 더 원가 절감을 할 곳이 없는지 점검하고 있는 단계”라며 “소비자가 인상은 불가피하겠지만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장에 신상품이 없다?
환율 인상의 영향은 패션 브랜드 매장에도 충격을 주었다. 대부분의 패션 업체가 중국 등 해외에서 생산한 제품의 납기를 최대한 늦추고 있어 가을 정기 세일을 마무리하고 겨울 상품으로 속속 채워져야 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신상품 입고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한 백화점 판매사원은 “명목상 정기 세일은 끝났지만 아직도 매장은 세일이 이어지고 있다”며 “가을 상품 판매율이 낮아 이를 만회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본사에서 겨울 신상품 출고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가두 매장도 상황은 비슷하다. 남성복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건대입구의 한 대리점 사장은 “막바지 가을 판매를 위한 것도 있지만 겨울 제품 투입이 예년보다 보름 이상 늦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실제 상당수 패션 브랜드들이 환율 급등에 따른 손실을 피하기 위해 납기 일자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식 밖의 클레임 처리가 횡행하는 등 부작용도 심각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프로모션 업체 사장은 부도 위기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올해 6월 국내 모 브랜드에 겨울 점퍼 5000장을 7500만원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샘플과 QC등 모든 과정을 이상 없이 거쳐 10월 초 들여왔는데 ‘주문한 색깔과 다르다’는 이유로 전량 클레임 처리 당했다는 것. 이 업체 사장은 “환율이 뛰어 납품하고 다 수금하더라도 손해가 이만저만 아닌데 한 군데만 더 이런 식으로 클레임 당하면 결국 부도가 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환율 상승으로 인해 생산비용 뿐만 아니라 물류비용, 관세까지 모두 급등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납품을 받아서는 수익을 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겨울 리오더와 스팟 물량은 대부분 국내로 전환하기로 하고 협력 업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원화 가치 하락으로 수입 원, 부자재 가격 부담이 크게 가중된 것은 물론 글로벌 소싱을 진행하고 있는 업체의 경우 봉제, 물류 비용까지 환율 대비 늘어나 오히려 국내 생산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생산도 생각만큼 여의치 않다. 최근 10년 사이 국내에 기반을 두고 있던 생산업체들의 상당수가 해외로 옮기면서 그만큼 업체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한 캐주얼 업체 본부장은 “환율이 폭등하면서 해외 발주 물량 가운데 중단 가능한 것은 바로 스톱을 걸었지만 국내 생산 기반이 무너져 생산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뛰어보지만 뾰족한 묘수는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나만 살고 보자 式 이기주의는 금물” 한 목소리
생산ㆍ브랜드ㆍ유통 유기적 공조체제 구축해야
협력업체 고사 직전, 생산기반 위축
고환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패션기업뿐만 아니라 협력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일찌감치 생산 기반을 마련하고 국내 업체들의 오더를 주로 받던 한 니트 봉제업체는 올 가을 지난해에 비해 두 배가 넘는 물량을 오더받았다. 가격도 저렴하고,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오더가 몰린 것이었다.
그러나 물량이 많아진 것이 화근이 됐다. 이 업체가 기준으로 삼는 제조마진은 원가의 10%. 그러나 위엔화 환율 상승폭이 이미 20%를 넘어버려 만들면 만들수록 손실이 커지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오랫동안 거래해 오던 일부 업체들은 사정을 감안하고 조금씩이나마 납품가 인상을 인정해줬지만 대다수는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오더를 받아놓고 잠적해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한 캐주얼 업체는 겨울용 모직 코트 3000장을 중국 칭다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업체에 맡겼다. 그러나 9월 중순 2차 QC를 위해 보내기로 한 샘플이 도착하지 않아 이 업체 사장을 수소문했지만 사무실을 닫고 잠적한지 1주일이나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특히 최근 2~3년 사이 패션 업체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원가절감에 있다보니 거래 기업의 안정성보다는 가격과 납기 속도를 우선해 부실을 키웠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봉제 업체는 물론이고 소재 업체들도 처지는 비슷하다. 중국에서 생산해 국내 업체들에 공급하고 있는 한 소재업체도 환율 상승으로 인해 야드당 500~600원씩 손해를 보면서 납품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형마트에 PB 완제품을 공급하는 업체일수록 어려움이 크다. 이마트 자체 브랜드인 ‘디자인 유나이티드’ 라벨을 붙여 납품하는 한 업체는 사실상 추가 납품을 포기한 상태다. 마진은 적지만 물량이 많아 비수기에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서 오더를 받아왔는데 이제 수익은 고사하고 손실을 떠안게 됐다.
패션ㆍ유통ㆍ협력업체 相生 위한 공조 나서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업계 일각에서는 패션시장을 이루는 모든 클러스터에서 상생을 위한 공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생산협력업체에서 패션기업, 백화점 등 유통업체로 이어지는 힘의 논리에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피해만 요구한다면 결국 공멸할 것이라는 논리다.
최근 들어 패션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악화되면서 어음 결제 비율과 기간이 모두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한 패션기업은 익월 현금 지급에서 익익월 3개월 어음 지급으로 결제 조건을 바꿨다. 그러나 이는 결국 생산 협력업체들의 부담을 가중시켜 장기적으로 생산과 브랜드, 유통업체를 잇는 연결고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 가운데 얼마전 형지어패럴은 협력업체 대금 결제를 전액 현금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어려운 시절을 겪은 최병오 회장이 “우리가 살기 위해 협력업체를 무너뜨리면 결국 우리도 공멸하고 말 것”이라면서 함께 사는 상생(相生)경영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패션업체 사장은 “원가 절감을 위해 해외로 물량을 옮겼지만 국내 생산 기반이 이정도로 무너졌을지는 몰랐다”며 “프로모션 업체들이 무너지고 나면 물건을 팔고 싶어도 만들어 줄 업체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현직을 떠난 원로 인사는 “우리 패션기업들은 IMF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 나온 저력을 갖고 있다. 시장이 성장하면서 체질도 많이 강화됐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유기적인 공조가 없으면 돌파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백화점 등 유통업체들도 일정 기간 판매 수수료를 인하해주는 등의 상생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패션기업들도 무분별한 클레임을 자제하는 등 생산업체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산업체들도 원ㆍ부자재 업체들을 돕는 자세로 위기 상황에 임하지 않으면 결국 모두가 공멸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명 기자
kjm@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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