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성장세 속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 구축이 관건
일본 뷰티 시장의 주도권이 대기업에서 중소 인디 브랜드로 넘어가고 있다. 일본수입화장품협회(CIAJ)에 따르면 2025년 한국 화장품 수입액은 1417억 7000만 엔(한화 약 1조 2759억 원)으로 전체 수입화장품 시장의 30.8%를 차지하며 4년 연속 1위를 지켰다. 성장세는 2026년에도 이어져 1분기 점유율은 33.5%까지 올라섰고, 2위 프랑스와의 격차도 더 벌어졌다.
주목할 대목은 승자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몇 년 전까지 일본 시장을 이끈 건 대기업 브랜드였지만, 최근 앳코스메·큐텐 상위권을 채우는 이름은 아누아, 넘버즈인, 퓌, VT코스메틱, 티르티르, 달바, 토리든, 바이오던스 같은 인디 브랜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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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누아는 자연유래 성분과 더마 화장품을 중심으로 일본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
성분이 브랜드를 이기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일본 소비자의 화장품 구매 기준이 ‘회사’에서 ‘성분’으로 옮겨갔다는 데 있다. 성분 정보 비대칭이 SNS 후기와 리뷰 플랫폼으로 해소되면서, 브랜드 인지도보다 개별 제품의 효능 검증이 구매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아누아(Anua)다. 운영사 더파운더즈는 자연 유래 원료의 함량을 라벨에 숫자로 직접 표기하는 ‘성분 투명성’ 전략을 앞세워, 2025년 연결 매출 7177억 원(전년 대비 67.8%↑)을 기록했다. 어성초 클렌징 폼과 조각달 아이크림으로 시작해 최근 PDRN 세럼까지 제품군을 넓히며, 성분 중심 소비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결과다.
넘버즈인(Numbuzin)은 이 원리를 콘셉트화한 사례다. 각 제품의 기능을 번호로 구분해 ‘숫자 화장품’이라는 직관적 메시지를 만들었고, 기획 세트 구성으로 가성비를 중시하는 일본 소비자에게 소구했다. 넘버즈인과 색조·스킨케어 경계를 허문 감성 패키징의 퓌(Fwee)를 함께 보유한 비나우는, 2018년 창업 이후 6년 만인 2024년 매출 2664억 원(전년 대비 133.6%↑)까지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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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버즈인은 각 제품의 기능을 번호로 구분해 ‘숫자 화장품’이라는 직관적 메시지를 만들어 국내외 시장을 공략했다. |
온라인 랭킹 올킬
일본 K-뷰티 확산의 결정적 채널은 큐텐(Qoo10)과 앳코스메(@cosme)다. 큐텐의 대형 할인 행사 ‘메가와리’는 한국 인디 브랜드의 테스트 마켓이자 스케일업 플랫폼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누아는 2024년 1·2·3분기 연속 메가와리 종합 매출 1위, 화장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베이재팬이 2026년 2월 개최한 ‘큐텐 어워즈 2025’에서는 한국 셀러 비중이 전년 30%에서 47%로 확대됐고, 최우수상 10개 중 아누아·바잘·VT코스메틱 등 5개가 한국 브랜드였다. 앞서 2025년 12월 처음 열린 ‘큐텐재팬 메가 뷰티 어워즈 2025’에서는 아누아의 레티놀 세럼이 대상을 받는 등 수상 제품의 87%가 한국 브랜드였다.
구매 전 검증 문화가 강한 일본 소비자에게 가장 신뢰받는 플랫폼은 앳코스메다. 2025년 상반기 베스트 신상 어워드에서는 아누아 제품 세 개가 동시에 상위 10위에 올랐고, 퓌는 2024년 쇼핑 브랜드 신인상을 받으며 도쿄 긴자·시부야, 오사카 우메다 등 주요 상권으로 오프라인 입점을 넓히고 있다. 같은 기간 롬앤(rom&nd)의 ‘쥬시 래스팅 틴트’는 판매량 6위, 투쿨포스쿨(too cool for school)의 ‘프로타주 펜슬’은 판매량 1위에 올라 일본 로컬 브랜드가 강세인 아이브로우 카테고리에서 이례적인 성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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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T 피디알엔 에센스 100 |
오프라인 점령, 인기 증명
온라인에서 검증된 인기가 오프라인 매대 확보로 이어지는 것도 하나의 패턴이다.
VT코스메틱은 마이크로니들 형태의 시카 성분 에센스 ‘리들샷’으로 일본 오프라인을 파고들었다. 2024년 화장품 매출(1774억 원)의 77%가 일본에서 나왔고, 운영사 브이티는 연결 매출 4317억 원(46%↑)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같은 흐름은 색조에서도 나타난다. 티르티르(TIRTIR)의 ‘마스크 핏 레드 쿠션’은 습도가 높은 일본 기후에도 무너지지 않는 밀착력으로 ‘국민 쿠션’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큐텐·라쿠텐과 7000여 개 오프라인 매장을 통해 2024년 매출 2736억 원(68%↑)을 올렸다. 이 제품의 일본 내 누적 판매량은 1000만 개를 넘었고, 일본 뷰티 어워드에서만 30여 개 부문을 수상했다. 루나(LUNA)도 컨실러 제품으로 온라인 리뷰에서 먼저 주목받은 뒤 2021년부터 오프라인 유통을 넓혀, 2025년 12월 기준 일본 내 1만 316개 매장에 입점했다.
다만 오프라인 랭킹은 손쉽게 뒤집히기도 한다. VT의 리들샷은 2025년 상반기까지 도큐핸즈 스킨케어 랭킹 10위권을 지켰지만, 8월 말 대부분의 유통 채널에서 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 여파로 9월 1일 모회사 브이티 주가가 장중 9.8% 급락했다. 온라인 화제성이 오프라인 매대 점유로 이어지는 속도만큼, 그 반대 방향의 추락도 빠르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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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바 화이트 트러플 퍼스트 스프레이 세럼 펩타이드 |
프리미엄으로 승부
성분과 온라인 화제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 아래, 프리미엄 포지셔닝으로 몸값을 높이는 브랜드들도 나타났다.
2025년 5월 코스피에 상장한 달바글로벌은 ‘화이트 트러플 퍼스트 스프레이 세럼’을 앞세운 프리미엄 비건 포지셔닝으로 2025년 매출 5198억 원(68.2%↑), 영업이익 1010억 원(68.9%↑)을 기록했다. 해외 매출 비중은 2023년 22.2%에서 2025년 60%대로 확대됐고, 그중 일본은 올해 1분기 매출 368억 원(67%↑)으로 해외 지역 중 비중이 가장 크다.
토리든(Torriden)은 ‘다이브인 저분자 히알루론산 세럼’ 하나로 2025년 매출 2743억 원의 역대 최고 실적을 냈고, 현재 일본을 포함한 41개국에 진출해 있다. 바이오던스(Biodance)는 고농축 에센스를 하이드로겔로 굳힌 ‘바이오-콜라겐 리얼 딥 마스크’로 카테고리 자체를 새로 만들며 2025년 매출 2481억 원(83%↑)을 기록했다. 세 브랜드 모두 대표 제품 하나를 프리미엄 카테고리의 표준으로 자리매김시키며 실적을 끌어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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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르티르의 글로벌 앰버서더 ‘뷔’ |
매출은 느는데 이익은?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내 한국 화장품 수입 증가율은 2024년 40%에서 2025년 5.6%로 큰 폭으로 낮아졌다. 일본 전체 화장품 수입 증가율 자체가 2024년 17.7%에서 2025년 3.1%로 둔화한 영향이 크지만, 시장이 포화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다만 2026년 1분기 들어 한국 화장품의 일본 수입 점유율이 33.5%까지 다시 올라서는 등 반등 조짐도 감지된다.
성장 둔화의 그늘은 개별 기업의 수익성에서도 확인된다. 아누아의 더파운더즈는 2025년 매출이 67.8% 늘었지만 마케팅 투자 확대로 영업이익은 11.1% 줄었다. 넘버즈인·퓌의 비나우 역시 2025년 매출 증가율이 22%대로 낮아졌고 수익성 지표는 2022년 공시 이후 처음으로 뒷걸음질했다. 롬앤·힌스를 보유한 아이패밀리에스씨도 2025년 3분기 누적 매출 증가율이 5.7%에 그쳤고 영업이익은 26.2% 줄었으며 VT코스메틱은 같은 기간 매출은 0.9% 느는 데 그치고 영업이익은 14.2% 감소했다. 큐텐 메가와리 등 대형 할인 행사에서 상위권을 지키기 위한 광고비와 인플루언서 마케팅 비용이 불어나면서, 매출은 늘어도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하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진단이다.
여기에 한국 브랜드 사이의 카피 제품 범람과 제형 복제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특정 브랜드의 혁신 제형이 입소문을 타면 짧은 기간 안에 유사 제형·패키징을 갖춘 브랜드들이 대거 일본 매대를 채운다. 동시에 중저가 인디 브랜드들이 일본 시장으로 대거 몰리면서 ‘자기잠식’ 현상에 대한 경계심도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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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퓌는 도쿄 긴자·시부야, 오사카 우메다 등 주요 상권으로 오프라인 입점을 넓히고 있다. |
이제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일본 시장은 더 이상 K뷰티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장이 아니다. 이미 한국 화장품이 가장 많이 판매되는 해외시장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고, 인디 브랜드 역시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앞으로의 경쟁은 판매량보다 브랜드의 지속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업계는 이제 일본 소비자들이 단순히 화제가 된 제품보다 브랜드의 신뢰도와 제품 포트폴리오, 안정적인 품질, 오프라인 유통 경쟁력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분석한다. 하나의 히트 제품으로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꾸준한 신제품 개발과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성분과 SNS 화제성으로 시작된 성장 경쟁은 이제 브랜드 가치와 수익성, 글로벌 확장성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일본에서 구축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까지 확장할 수 있는 브랜드만이 다음 성장 국면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희정 기자
heejung@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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