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이 곧 경쟁력…단순 창작에서 큐레이션으로 진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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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이 발전할수록 브랜드의 정체성과 감성을 고객 경험으로 연결하는 안목이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
지금의 패션 산업은 거대한 전환점 위에 서 있다. 생산 현장에서는 로봇이 사람의 손을 대신하고, 기획 단계에서는 생성형 AI가 수백, 수천 개의 디자인 시안을 몇 분 만에 만들어낸다. 기술 혁신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자동화 공장이나 새로운 디자인 툴을 떠올리지만, 정작 기업이 맞닥뜨린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기술이 대부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사람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특히 패션 기업 경영자와 브랜드 마케터들에게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하다. 이제 경쟁은 더 좋은 AI를 도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구나 비슷한 수준의 AI와 자동화 설비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결국 차이는 기술을 활용해 고객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브랜드만의 가치를 만들어 내느냐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걸 찾아야
과거 디자이너의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게 트렌드를 분석하고, 스케치를 만들고, 작업지시서를 작성하느냐에 있었다. 밤새 시장조사를 하고 샘플을 수정하는 반복 작업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생성형 AI는 인간이 한 시즌 동안 고민할 양의 디자인을 단 몇 분 만에 만들어낸다. 속도와 생산량에서 인간은 더 이상 AI를 이길 수 없다.
여기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창작자’에서 ‘큐레이터’이자 ‘브랜드 디렉터’로 바뀐다. AI가 쏟아낸 수많은 결과물 가운데 우리 브랜드의 철학과 고객 취향에 가장 적합한 단 하나를 골라내는 능력이 핵심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특히 마케팅 관점에서 보면 이 변화는 더욱 의미가 크다. 소비자는 단순히 예쁜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브랜드의 이야기에 반응한다. AI가 만들어낸 디자인은 비슷할 수 있지만, 어떤 제품을 선택하고 어떤 스토리로 고객에게 전달할지는 결국 인간의 영역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제품의 품질은 평준화된다. 그럴수록 브랜드의 정체성과 감성을 고객 경험으로 연결하는 안목이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디자인보다 ‘고객 데이터’가 중요
디자이너가 ‘선택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패션 회사의 업무 방식도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기존에는 디자이너가 제품을 만들고, MD가 물량을 계획하고, 마케터가 광고를 집행하는 식의 순차적 구조였다. 하지만 AI 시대에 이 방식은 너무 느리다. 고객의 취향은 실시간으로 변하고, SNS와 플랫폼 데이터는 하루에도 수없이 새로운 신호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디자이너도 데이터를 읽어야 한다. 이 제품이 왜 팔리는지, 어떤 고객이 반응하는지, 어떤 키워드가 SNS에서 확산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반대로 마케터 역시 단순히 광고를 집행하는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상품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고객의 목소리를 제품에 반영해야 한다. 실제로 최근 글로벌 브랜드들은 검색량, 리뷰, SNS 언급량 등을 분석해 디자인과 생산량을 조정하는 ‘데이터 기반 상품기획’을 확대하고 있다.
결국 미래의 패션 기업에서는 디자이너와 MD, 마케터가 서로 다른 부서가 아니라 하나의 고객 경험을 만드는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마케팅 중심은 ‘피드백 루프’
AI 시대에 가장 강한 브랜드는 광고를 많이 하는 회사가 아니다. 고객 반응을 가장 빨리 제품에 반영하는 회사다.
과거에는 시즌을 기획하고 대량 생산한 뒤 대규모 마케팅을 통해 판매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제는 AI가 디자인을 만들고, 소량 생산으로 시장 반응을 테스트한 뒤,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가 생산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가 훨씬 효율적이다.
이 과정에서 마케팅은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첫 번째 단계가 된다.
광고 캠페인은 단순한 판매 수단이 아니라 고객 데이터를 수집하는 실험장이 되고, SNS 콘텐츠와 라이브 방송, 리뷰는 다음 시즌 기획을 위한 핵심 데이터가 된다.
결국 미래의 마케터는 ‘어떻게 많이 팔 것인가’보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빠른 실행력이 관건
이런 변화에 맞춰 조직도 바뀌어야 한다.
AI와 로봇이 움직이는 속도를 기존의 수직적 결재 구조가 따라갈 수는 없다. 팀장, 본부장, 대표이사로 이어지는 긴 의사결정 과정은 시장의 타이밍을 놓치게 만든다.
그래서 앞으로는 디자이너, MD, 마케터가 하나의 작은 스타트업처럼 움직이는 ‘애자일 데이터 셀(Agile Data Cell)’이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같은 대시보드를 보며 고객 데이터를 확인하고, AI로 기획안을 만들고, 소량 생산 후 시장 반응을 분석해 다음 결정을 즉시 내린다. 중요한 것은 보고서를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데이터를 보고 빠르게 실행하는 능력이다.
패션 산업도 이제 제조업이 아니라 데이터 산업에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경영자가 지금 당장 바꿔야 할 세 가지
첫째, 평가 기준을 바꿔야 한다.
디자이너에게 몇 개의 스타일을 만들었는지 묻기보다, 선택한 상품이 얼마나 고객의 선택을 받았는지 평가해야 한다. 마케터 역시 광고 노출보다 실제 구매 전환과 고객 충성도를 중심으로 성과를 봐야 한다.
둘째, 데이터가 끊기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AI가 만든 기획안이 생산과 물류, 판매 데이터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돼야 한다. 중간에 사람이 다시 수작업으로 옮겨 적는 구조라면 AI의 장점은 절반도 살리지 못한다.
셋째, 채용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앞으로 필요한 인재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만도, 데이터를 잘 보는 사람만도 아니다. 브랜드 철학을 이해하면서도 숫자를 읽을 줄 아는 ‘하이브리드형 브랜드 디렉터’가 기업의 미래 경쟁력이 될 것이다.
기술은 결국 모두에게 보급된다. 몇 년 후에는 대부분의 패션 기업이 비슷한 AI와 자동화 설비를 갖추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승부를 가르는 것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고객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그 데이터를 브랜드 가치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패션 산업의 미래는 ‘누가 더 많은 옷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고객의 마음을 가장 빨리 읽고 움직일 수 있는가’의 경쟁이 될 것이다. 디자이너의 연필을 AI가 대신하는 시대, 인간에게 남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브랜드와 고객을 연결하는 안목과 마케팅의 힘이다.
이정준 대표
brpc@brepea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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